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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Dec 14. 2020

나의 호두를 먹어줘

“하나씩 드세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니터 위 무미건조하게 떠 있는 숫자들과 씨름하는 월요일, 한 쌍의 커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나누어준다. 우리 쪽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와 내 책상 위에도 스윽- 밀어 넣어준다. 땅콩, 호두, 아몬드와 피스타치오가 꾹꾹 눌러 담긴 동그랗고 긴 통이다. 요새는 답례품을 이렇게도 주나 보다. 비스듬히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박 대리와 김 사원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이름 사이에는 새빨간 하트가 그려져 있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 둘은 보란 듯이, 부부가 되었다. 월요일 아침은 유독 허기지다. 뚜껑을 열어 땅콩을 집어 든다. 설탕이 알맞게 붙어있는 땅콩은 짠 아몬드를 먹고 싶게 한다. 짠 아몬드를 먹고 나면 초콜릿이 묻어있는 피스타치오가 먹고 싶고. 그렇게 심심한 입을 달래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견과류가 가득했던 통에는 호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호두의 쌉싸름한 맛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언젠간 먹겠지 싶어 버리지 못하고 뚜껑을 닫아 책상 한편에 둔다. 한 달이나 지났나, 호두만 가득한 통은 지금도 그 자리 그대로 놓여있다. 버리지도 못할 저 호두들을 어떡하면 좋을까.



“너도 좋아하는구나, 나도 좋아해.”


 마음을 움직이려는 시도들. 삐뚤빼뚤한 퍼즐판에 어렵사리 합을 맞추려는 손짓들. 나만의 명곡이라 생각했던 그 노래를 너도 알고 있었다고, 그 곡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그 빛나는 눈동자들. 상황을 역전시킨 듯 체크메이트를 미리 외쳐버리는, 마음의 제스처가 빤하게 보이는 얼굴들. 자신을 드러내려는, 솔직해 보이는 거짓말은 그들의 눈에 투영되고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내 피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우리 사이의 공백을 말로 메워버리는 무모함. 낯을 잘 가리지 않는 편임에도 한 걸음 물러나버린다. 그런 관계들은 수많은 나의 밤들을 헤집어 놓았으니 쉬이 동요하지 않기로 한다. 사는 동안 좋아져 버린 것들 중 우연히 같은 것에 마음이 동했을 뿐, 서로의 마음을 동하기엔 삶이 가진 주파수의 진폭이 다르다면 한 데 맞추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아버린 탓에.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법한 이 길은 갈래길만 무성하고 끝은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부딪히는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나침반을 들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고르고 정처 없이 걷는다. 맞는 길인지 잠시 멈춰 설 때도 있고 자신감에 차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을 때도 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면 지나가던 행인을 우연처럼 만나고 오래도록 나와 보폭을 맞춰가다 어느새 ‘함께’ 걸어가는 형색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우연처럼 닿은 우리가 같이 걷는 행위를 행복해하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면 그제서야 나는 그에게 내 남은 호두를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기어코 씹어내지 못한 감정들을 내어줄 때 묵묵히 손을 내밀 수 있는 서로가 있다면 다른 걸음걸이, 다른 모양새의 우리여도 상관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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