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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Jan 31. 2021

무슨 대답을 원했던 걸까

이번은 좀 다른 느낌이다. 시간이란 놈이 나는 신청한 적 없는 경주를 제 멋대로 시작하고 경보 중이다. 엉덩이를 씰룩대며 걷는 행세를 보자니 얄미워 죽을 지경이다. 한참 약이 올랐을 때쯤, 아는 후배와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가 지난 주말 다녀온 여의도 점집 후기를 들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감탄사를 간간히 섞으면서 술술 이야기하던 후배는 대-충 봐주는 것 같지만서도 툭툭 던지는 말이 가슴에 팍팍 꽂힌다며 한번 가보라고 추천했다. 이 정도면 점집 아주머니가 후배에게 뽀찌를 슬쩍 넣어준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기독교 신자인지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점집을, 무슨 용기가 났는지 문자로 덜컥 예약해버렸다. 그래, 이 모든 게 다 저 씰룩이는 엉덩이 때문이다.




주소는 여의도에 위치한 어느 오피스텔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쉬고 벨을 누르니 키가 작은 어떤 50대의 아주머니가 문을 슬쩍 열어주셨다. 책상 하나가 중앙에 놓여있고 그 뒤에는 큰 통창이 있어 햇빛이 포근하게 들어오는 아늑한 곳이었다. 손짓으로 안내해주신 의자에 앉자 선생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건너편에 앉아 펜을 쥐고 내 생년월일시를 한 글자씩 옮겨 적으셨다.


“올해 바쁘기도 바쁠 거고 짝도 찾겠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변화가 많을 거야. 건강 조심해야겠다.”


최근 어려워진 업계 탓에 회사 내부가 뒤숭숭하기도 했고 변화의 중심에 내가 속한 팀이 있던 터라 ‘이거 자칫하다 엄청 바빠지겠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기에 어렵게 차지한 워라밸이 무너질까 두려웠던 참이었다. 짬밥으로 느껴지는 이 부정하고 싶은 슬픈 예감이 현실이 될지 궁금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나의 연애의 역사를 반전시켜줄 만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나의 여생을 함께 꾸려갈 ‘팀원’을 구할 수 있는지도. 경계심을 잔뜩 품고 갔기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서도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대답을 단숨에 들어버리니 말문이 막혔다. 종이에 알 수 없는 글자를 끄적이다 한 글자에 동그라미를 연신 쳐대던 선생님은 40대부터 사업운이 있으니 지금은 회사에서 꼼짝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종이 위를 끝없이 움직이던 연필이 멈췄고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해 꽂혔다. 그리고 사주에 좋은 것 투성이인 아가씨가 무슨 걱정을 그렇게 짊어지고 사냐 했다. 그러게요, 전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는 걸까요.





새해를 두 팔 벌려 맞이하며 힘차게 시작했으나 문득 작년을 돌이켜보니 ‘인생은 변수의 연속’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기대보다는 다가올 날들을 향한 불안에 나도 모르게 위태로이 기대어 버렸나 보다. 사실 과거에 기반한다면 나의 올해도 지나온 해와 다름없이, 아니 어쩌면 과거의 그 어떤 나보다 더 바쁠 것이고 인연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그 어딘가에서 또다시 만날 것이다. 변화가 더 많은 30대 중반을 겪는다는 건 사실 나도 마음 한편에서 이미 예견했을 미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나도 모르는 미래를 명확하게 예견하고 손수 마침표까지 꾹- 찍어버리는 선생님의 단호한 문장들에서 안도감을 얻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제야 헛된 걱정들을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로 했다. ‘현재에 최선을 다 하면 된다’는 좌우명을 자꾸 애먼 곳에 던져두지 말기로 했다.


오피스텔에서 나서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 앞에는 우리 엄마 뻘의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나가려는 나와 동선이 엉켜 몇 차례 움찔하시다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시고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복도에서 아주머니의 선한 눈을 다시 떠올렸다. 나가려는 문을 여는 순간 마주했던 눈빛에는 불안이 담겨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를 맞이했던 사주 선생님이 본 나의 눈빛을 본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오피스텔을 나서는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시간의 농락에 마음을 써버린 우리를 향해 쓴웃음이라도 슬쩍 지어주고 담았던 걱정을 탈탈 털고 나오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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