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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알린 요한나 반 고흐 봉허

무명의 시숙을 평생동안 세상에 알린 제수

by 긍정태리 Mar 20. 2025

예전에 고흐와 동생 테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가족을 잘 보살폈던 기토 테오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다.


https://brunch.co.kr/@iammerry/125



좀 더 이 형제의 이야기에 들어가보니, 무명의 고흐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테오의 부인 요한나였다. 고흐는 생전 1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고, 테오 또한 몇개월 후 세상을 뜨고 만다.  세상이 아무도 고흐의 그림을 알지 못할때, 그의 그림의 가치를 정리해서 알리는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한 요한나에게 무언가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생년월일을 찾아봤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D%95%9C%EB%82%98_%EB%B0%98_%EA%B3%A0%ED%9D%90-%EB%B4%89%ED%97%88


브런치 글 이미지 1


위키백과 나오는 그녀의 생일은 <1862년 10월 4일>이다. 시는 모르니 정확한 풀이는 못하고, 저 생일이 틀릴수도 있지만, 이 사주로 설명하는 그녀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정교함을 뜻하는 신금으로 태어난 요한나는 인비가 강한 사주를 타고나 주체성과 자기만의 철학이 강하다. 그래서, 남의 이목에 상관없이 본인이 생각을 소신껏 진행해왔다. 연간 임수 상관이 편인들에 의해 적절한 제어를 받고 있으니, 깊은 사고에서 나오는 언어 표현능력이 뛰어나다. 실제로 첫눈에 반한 테오에게  연애편지를 보내 사랑을 키웠다. 나중에 고흐와 테오의 형제 이야기도 스토리 텔링을 잘해 형제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펴 냈으며, 형제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고 덩쿨을 심어 우애를 상징한 것도 요한나의 이야기 능력이다.


평생 명예를 지키는 일을 했으니, 시주에 관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18정미대운부터 관성(결혼과 책임,명예,조직운) 이 들어왔다. 이때, 테오와 결혼을 하고, 1890년 아들을 출산한다. 삼촌 고흐는 조카에게 아몬드꽃 그림을 선물로 기쁨과 축복을 표현했다. 하늘색 바탕에 흰 아몬드꽃 그림이 설레임과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조카의 이름은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딴 빈센트 반 고흐.

<아몬드꽃> 빈센트 반 고흐<아몬드꽃> 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오래지 않아 1890년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다 권총자살로 유명을 달리한다. 동생 테오도 형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우울증과 죄책감에 힘들어 하다 1891년 유명을 달리한다. 이때 요한나는 28병오대운. 겨우 28살이었다. 큰 슬픔 속에서도 고흐와 테오의 그림과 편지를 모으고 정리하고 알린건 책임과 역할을 알게 하는 관성대운의 힘이었다. 이렇게 신강한 명식에서 사회적 역할을 일깨우는 관성-재성 대운이 청년-중년까지 흐른게 요한나를 도왔다. 신강하면 자기만의 세상으로 빠지기 쉬운데, 관성-재성대운이 사회와의 접점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파리의 작업실에 있던 고흐의 그림과 드로잉을 버리라고 했지만, 요한나는 생전 고흐의 작품을 지원했던 테오의 뜻을 잊지 않는다. 고흐의 드로잉, 스케치인 유작을 모두 모아, 암스테르담 동쪽에 하숙집을 차리고, 고흐의 작품을 걸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보게 했다. 아들에게 생전 큰아버지 고흐의 작품을 기리는 일은 뜻깊다는걸 인지시키고, 이 작업을 모두 일기에 기록한다. 평단의 비웃음도 샀지만, 소신을 꺽지 않고 회고전을 열어 고흐의 작품을 판다. 이 지속적인 노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퍼진다. 마치 햇살이 지속적으로 퍼지면, 결국 외투를 벗듯이 햇살같은 고흐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다.


요한나의 고흐를 알리려는 10년 노력이 인정을 받은 1901년 (38을사대운, 편재정관대운:경제적활동으로 명예를 얻다) 에 화가 요한 홀스할크와 재혼을 하고, 1905년(을사년)에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고흐 회고전을 크게 연다. 48갑진대운(정재편인)인 1914년 갑인년에는 고흐와 테오의 700여통의 편지를 모아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낸다.  목 재성은 수평적 네트워크와 여러사람을 만나고, 경제적 활동을 하고,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걸 뜻한다. 38을사대운과 48갑진대운에 대중에게 고흐를 더욱 알리는 활동이 강해진다. 1915-1919년(을묘년-기미년) 미국에 건너가 서간집을 번역 판매해서 더욱더 고흐의 작품을 알린다. 갑목이 대운에 들어오면 큰 전환점을 맞이 한다는데, 중년에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58계묘대운(식신편재대운)인 1924년에는 런던 내셔널 미술관에 <해바라기>등 고흐의 작품을 팔아 가치를 높였다. 1925년(을축년) 유명을 달리할때까지 고흐의 작품을 알리는 일을 지속적으로 한것이다. 그후 아들이 엄마의 일을 이어받아 고흐의 명성이 높아지자 고흐의 모든 작품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 기탁한다.


정교하고 섬세한 완벽주의를 뜻하는 신묘일주 답게  고흐라는 한분야를 완벽하게 알린 요한나. 일지 재성답게 경제적 이득을 통한 명성이었지만, 편인으로 고귀한 인간다운 가치를 일깨우는 스토리텔링이 그녀의 고유한 방법이었다. 무명의 고흐였으니, 요한나의 노력이 없었으면 아무도 가치를 몰랐을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한사람의 인생도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빛이 난다. 정신병과 무명의 서러움으로 힘들겐 산 고흐였지만, 그 힘듦과 고통을 밝은 그림으로 승화한 노력을 알아주는 가족이 있었다. 그런 요한나의 노력때문에 삶에 지치고 서러울때 우리도 고흐의 작품을 보며 빛을 찾는 마음이 되는게 아닐까? 인간의 서러움은 드러내고 공감받고 남이 알아줄때 희석되고 날아가기 때문이다.


요한나는 본인의 작품이 주인공이 아니었다. 고흐가 메인이었고, 그녀는 뒤에서 고흐를 알리는 역할만 할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이 결코 작은게 아니다. 어떤 이는 내가 메인이 아니라 뒤에서 보조해줄때 더 맞는 사람이 있다. 한분야를 정교히 파는 신묘일주인 요한나는 더욱 그런 역할이 잘 맞았다. 자신에게 잘 맞는 역할을 찾아 평생에 걸쳐 몰입한 요한나. 자연에서 크고 작음, 힘세고 약한게 우열이 아니듯이, 우리도 약하고 작으면 그대로 나에게 맞는 역할을 인지하고 충실할때 거대한 전체에서 조화를 이룬다는걸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크고 강한것만이 필요한게 아니다. 때로는 약하고 섬세한게 필요한 역할이 있다. 고흐의 작품을 좋아한 만큼, 세상과의 징검다리가 된 요한나를 기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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