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데 없다고 할 수 없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마음 아파도 괜찮아요. 나는 나는 나는 괜찮아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괜찮은 병원 환자들이 로비에 모여 부르는 노래다. 한 동요를 개사한 것인데 어찌나 와 닿던지. 원장으로 나오는 김창완 목소리는 어떻고. 계속 듣고 싶은 노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정상(normal)이기 위해 살아왔던 것 같다. 학교 공부를 해야 정상이고, 취직을 해야 정상이다. 뭐 이런 강박이 내면에 깔려 있어 비정상이 되면 낙오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특히, 어린 눈으로 보기에 막내 화섭이는 괜찮지 않은 동생이었기에, 괜찮음이 환영받는 세상에서, 괜찮지 않은 가족을 가진건 특별히 무언가를 안 해도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 화섭이는 툭하면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그 후에 이어지는 건 괜찮지 않은 사건에 분개하는 아버지의 화를 듣는 것이었다. 그게 참 지겹고 힘들었다. 그래도 만만한 게 화섭이어서 하루는 화섭이를 앉혀놓고 말한 적 있다.
"화섭아, '난 이제부터 집을 나가지 않아.'라고 말해봐."
"난 이제부터 집을 나가지 않아."
물론 그런 말을 한다고 한순간에 화섭이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 내일 화섭이가 변할 것 같았다. 헛된 바람과 희망이어도 그 말을 시켰다. 화섭이가 정상이었다면 우리 집은 정말 많이 바뀌었겠지라고 수없이 상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 화섭이는 존재했고, 바뀐 건 화섭 씨를 보는 나의 관점이었다.
문제는 화섭 씨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이러해야 해."라는 나의 생각이었다. 선천적인 성격, 환경과 교육에 의해 알게 모르게 주입된 이러해야 해라는 전제가 내가 화섭 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근 사주 공부를 하니 템플 그렌딘 등 자폐스펙트럼 장애나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주 공통점이 있었다.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뜻하는 재성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재성이 고립되었다고 모두 장애를 가진건 아니다. 사회성이 부족한 장애의 원인을 사주에서 굳이 찾다 보니 나온 이론이다.) 화섭 씨 사주를 보니 화섭 씨 사주 또한 화 재성이 고립되어 있다. 반면, 나는 재성 다자 누나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쉽고 편한 사주 구조. "인간이라면 수평적인 인관관계를 활발히 맺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보면 화섭 씨는 괜찮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만 내려놓으면 화섭 씨는 괜찮은 사람이다.
친구는 없지만, 좋아하는 것은 있다. 어제는 연금복권을 사기 위해 영등포까지 지하철을 타고, 지도 앱을 보고 복권판매소를 찾았다고 한다. 그 자랑을 누나인 나에게 어찌나 하는지. 앱을 보고 어딜 들어갔는데, 실제로 그 판매소가 있었어!라고 보물 찾은 경험담을 자랑하는 양, 야~ 하는 감탄사를 넣어가며 말한다. 내가 보기엔 친구가 없어 외로워 보이지만, 화섭 씨가 바라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복권이라 전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
"친구가 없어도 괜찮아."
내가 화섭 씨를 보며 스스로 되뇌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지만, 억지로 시키진 말자. 누나는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친구 되는 사회를 원한다. 그것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뜻하기도 하고, 화섭 씨가 사회에서 존중받고 보호받기 좋은 사회를 뜻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섭 씨는 어느 정도 사람들과 보드게임을 하다 피곤함을 느끼고 혼자 있고 싶어 한다. 그러면 그 시간도 존중해줘야지.
가을이다. 돌아보니 화섭 씨랑 여행을 간 적이 30대 강릉에 간 것 말고 없다. 가족과 여행 다니기 좋아하는 나는 엄마랑 가을맞이 여행을 갈 계획을 세운다. 밥을 먹다 화섭 씨에게 말해본다.
"화섭아, 담주에 누나랑 엄마랑 양평 갈래? 서울을 벗어나는 거지만, 엄마랑 가면 재밌을 거야."
평소 화섭 씨는 서울 밖은 너무 멀다며 그 이상 나가는 것을 묘하게 싫어한다.
"싫어!"
"왜, 30대에는 누나랑 강릉도 갔었잖아."
"그래도 싫어."
그래, 지금 화섭 씨는 30대가 아니지. 퇴근하고 오면 피곤하다고 낮잠부터 자는 화섭 씨이다.
"그때는 30대는 젊어서 갈만 했는데, 지금은 피곤해서 주말에 자고 싶은 거야?"
"응, 그래"
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래, 여행 싫어해도 괜찮아. 어떠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