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데 없다고 할 수 없다
주변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나온 드라마라고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추천했다. 추석 연휴를 맞이해서 몰아보기로 시청해봤다. 우리 조카도 좋아하는 김수현이 나와서 좋고, 그로테스크한 동화나 화면 구성 등 볼 거리가 많아 좋다.
나의 관심은 자연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오정세 역이다. 김수현의 형으로 나온다. 난 내 동생이 자폐지만, 만약 형이나 언니가 그런 장애를 갖고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간혹 한다. 동생을 보살피는게 어릴때부터 자연스럽지만, 형이나 언니를 보살피는것은 어떨까? 나는 어느 정도 컸을때 동생이 태어났다. 그런 상황인데도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온통 막내에게 몰리는게 가슴 아프기도 하고, 이해되면서도, 뭔거 허전했다. 그런데, 동생으로 태어나보니 손위 형이나 언니가 나보다 더 보살핌을 많이 받아야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평생.
이건 드라마지만, 현실세계에서 실질적으로 그런 동생들이 많기에 김수현이 많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특히 형문제가 생길때마다 직장을 옮기고, 문제가 생긴곳에서 일절의 타협이나 설명없이 도망가는 장면에선 더더욱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을 일부러 억누르고 차단한 캐릭터 인것 같다. 실제로 내가 보아온 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은 감정을 억누르고 산다. 남자로 태어나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것은 남자답지 않다고 교육받아서 인듯 하다. 감정이란, 충분히 느끼고 내보내면 지나가는 것인데, 그 과정 없이 억누르는것. 그것은 몸에도 좋지 않아, 개인적인 의견으론 남자들의 수명이 여자보다 짧은것 같다. 여자들은 수다건 눈물이건 어떤식으로든 감정을 내보내니까.
여하튼, 드라마를 보며 오정세(극중에선 문상태)의 행동들에 설명을 달아주고 싶은 욕구가 많이 들었다. 나도 어릴땐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동생의 특출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 동생은 지금은 돌발행동이나 불안발작을 보이진 않지만, 어릴때는 오정세처럼 공공장소에서 불안해 하기도 했다. 아마도 설명도 못하는 김수현의 상태는 여러 일로 지친 무기력인것 같다. 드라마에서 자막으로 설명이 없으니 이 자리를 빌려 써본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돌발행동을 제어하는 전두엽의 이상을 가진 뇌를 가진 친구들이다. 그 뇌의 특성때문에 사회성을 맡은 부분이 떨어지고, 대신 한 분야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말은 그 분야가 너무나 다양하고 넓어서 큰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뜻이다. 돌발행동이나 안정감을 제어하는 전두엽이 불안정해서 이친구들은 각각 본인의 불안을 자극하는 특정한 영역이 있다. 이것을 건드리면 비장애인은 아무렇지도 않는데, 이 친구는 불안한 상태가 나타난다. 오정세는 머리에 그런 불안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 머리에 자극이 가면 불안 발작을 일으키는것 같다. 극 후반에 그 이유가 나온다.
화섭씨는 큰 목소리나 비난의 말에 불안해 한다. 어릴때는 그런 말을 들으면 혼자 중얼거리는 상동행동이 심해졌다. 혼자 중얼거리는것은 본인의 불안함을 달래는 행위이다. 화섭씨가 불안해 하는것을 안정시켜주면 편안해 한다.
극중 오정세가 한 동화를 좋아한다. 템플 그랜딘의 설명으로는 말과 글을 좋아하는 Verbal Thinker 같다. 우리 화섭씨도 말과 글을 좋아해, 인쇄물을 좋아한다. 오정세가 동화책을 좋아했듯 화섭씨는 ㅎ모 잡지를 좋아한다. 화섭씨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서점이고. 경품 응모를 위해 글을 쓰는것을 좋아한다. 특히 L사 가전제품을 좋아해 그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쓰라면 잘 쓸것 같다. 그런데, 오정세는 그림또한 잘 그린다. 너무 능력많은 캐릭터이다. 드라마라서 그렇게 설정했겠지만, Verbal Thinker 이자 Visual Thnker 도 되는것 같다.
2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공룡을 좋아하는 오정세가 한 어린이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다. 극중 갈등을 높이기 위해 그 어린이의 부모님의 반응은 현실보다 과장되게 묘사되었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친구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한 분야를 만나면 나머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정세는 공룡을 좋아해, 그 공룡에 대한 지식을 말했을뿐이다. 비장애인과 다른 말투와 상호작용이 안되는 대화로 아버지는 오정세를 경계하고 머리채까지 잡아채는 행동을 한다. 그때 내가 김수현 이었다면, "우리 형은 자폐장애가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한 분야만 봐요. 어린이를 해치려는게 아니이에요. 공룡에 대해 이야기했을뿐이에요."라고 설명하고 이해시켰을것이다. 영화 말아톤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얼룩말을 좋아하는 초원이가 지하철에서 얼룩무늬 치마를 입은 아가씨에게 다가가 얼룩무늬를 만졌다가, 그 아가씨의 남친에게 오해를 사 뺨을 맞는 장면. 그때 어머니께서 나타났고 초원이는 평소 이런 상황에 엄마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아는터라 "우리 아이에겐 장애가 있어요."라고 소리친다. 그 영화를 볼 당시마다 정말 많이 울었다. 지금은 울지 않고 말할수 있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이다. 김수현은 드라마의 갈등을 고조시키려고 형에 대한 설명을 대중에게 안한다. 어쩌면 극중 대사처럼 그냥 도망가는 법만 알고 있을지 모른다.
원래 사는게 죽을만큼 힘들면 도망가는게 편하거든.
김수현의 그 대사가 어린시절 나를 보는듯 하다. 동생 문제에 도망가기도 많이 했던 나. 하지만, 형 오정세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동생에서 이런 말을 던진다.
형만 믿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형을 어떻게 믿을까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저 말의 의미를 안다. 존재만으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것. 어쩔땐 나도 화섭씨의 존재가 나에게 믿음과 힘을 준다. 이 오묘한 관계는 체험해 본 가족만이 알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들이 연약한 자식의 존재가 믿음과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는 자식을 둬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결국 연속보기로 마지막까지 다 봤다. 독립을 꿈꾸는 오정세의 앤딩신에선 눈물이 많아 나왔다. 오정세가 그린 동화도 좋고. 특히 오정세 연기 너무 잘한다. 연말에 상 받았으면 좋겠다.
진짜 진짜 얼굴을 찾아서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나오는 마지막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