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벨기에 (2)
나에게 Armani 가죽 재킷과 악어가죽 핸드백을 선물로 준 디자이너는, 내가 ‘빌려준’ 300유로를 들고 사라졌고, 그가 종이가방에 넣었다던 명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가죽 재킷과 악어가죽을 꺼내보았다. 분명히 명품이어야 할 재킷과 핸드백은 할머니가 시장에 갈 때 입으시는 옷들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부정하려 애썼다.
이름도 모르는 그 디자이너를 벨기에 한복판에서 어떻게 다시 찾는단 말인가. 망연자실하던 차에, 그가 나에게 이름과 메일 주소를 써달라며 손에 쥐여줬던 연필이 떠올랐다. 연필에는 “Mariott” 라고 쓰여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단서였다. 그 사람이 정말 디자이너든 아니든, Mariott 호텔에 머물렀을 때 그 연필을 받았다면,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투숙객 명부에서 그 사람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멈춰 있던 머리가 이상한 타이밍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좋다, 메리어트 호텔로 가자. 구글맵으로 위치를 검색하고 호텔로 쉬지 않고 달렸다.
호텔에 가서 지배인 같은 사람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호텔의 연필은 투숙하지 않고 로비에만 와도 공짜로 얻을 수 있습니다. 손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흔한 사기 수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감이지만, 빨리 경찰서로 가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래서 경찰서로 갔다. 외국인 관련 사건을 전담하는 부서를 찾아가서 번호표를 뽑고 앉아서 기다렸다.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경찰서를 벨기에에서 가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자, 경찰관은 사건의 정황을 듣더니, 사기 사건으로 접수하기 위해서 진술서를 써 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겪은 이야기를 열심히 적었다. 진술서에 나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스스로가 객관화되고, 점점 더 명확해졌다.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이.
이미 머리로는 그 디자이너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마음은 그것을 계속해서 부정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든 내 돈을 갚기 위해서 연락을 줄 거야. 이 옷과 가방은 비록 남대문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생겼지만 정말로 그가 디자인한 명품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진술서를 제출한 다음은 경찰관과의 면담 시간이었다.
경찰관이 물었다.
잘못을 저질러서 혼나는 기분으로 옷과 가방을 꺼냈다.
경찰관의 물음에 옷을 다시 보았다.
경찰서를 나왔다. 그랑플라스를 터덜터덜 걸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갑자기 하늘에서 비둘기 똥이 떨어져 입고 있던 옷에 묻었다.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오늘 나에게 일어난 꿈만 같은 불행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살면서 새똥을 맞아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바로 사기를 당한 그 날이라니. 절대적인 어떤 존재가 나를 갖고 짓궂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까지 찬 바람을 맞으며 혼자 걸어갔다. 300유로를 한순간에 잃은 나에게 비싼 식사는 사치였다. 마트에 가서 가장 싼 샌드위치로 허기를 채웠다. 브뤼셀의 저녁, 한국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내 돈을 갖고 사라졌다. 탓할 사람은 멍청한 나 스스로밖에 없다. 지나가는 모든 행인이 미웠다.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찬 바람을 맞고 청승맞게 걸었다.
브뤼셀에서 돌아오고 나선, 재킷과 가방을 버리지 않고 기숙사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걸어두면서 누구도 믿지 말자, 그리고 그 사람을 언젠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가만두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일주일이 지나니 돈은 어떻게든 마련할 방법이 생겼다. 속상한 마음도 가라앉았다. 내가 웃으면서 나의 수기를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듣고 배를 잡고 웃다가 기숙사 벽에 걸린 가방을 실제로 보면 자지러졌다.
탓할 사람이 스스로밖에 없는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간인가보다. 가난하고 멍청하고 어린 여행객을 속여서 돈을 빼앗아간 것도 사람이고, 지나가다 새똥을 맞은 사람에게 물티슈를 말없이 건네줬던 것도 사람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는 조금 더 많다,는 것이 내가 가진 믿음이다. 이 믿음을 되찾아준 것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