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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Feb 28. 2024

36살, 최고령 곰신이 되다


드디어 왔다. 남자친구의 입대날이 왔다. 그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슬펐다. 내 나이가 36살이라 더 슬펐다. 30대 중반에 고무신이 된 내 처지가 처량하고 난감했다. 미필의 10살 어린 남친은 힙합 글쓰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새로운 회원인 그는 나이에 비해 노안이었지만 앳된 모습이 힐끗 보였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이제야 한국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초등학교 5학년이 몇 년도냐고 묻자 2009년이라고 했다. 움찔했다. 내가 08학번이었기 때문이다. 삼수를 안 했다면 06학번이다. 벌써 내 나이가 그렇게 됐다니! 그리고 웃겼다. 대학교 때 초등학교 멘토링 봉사를 나갔다던 동기들이 떠올랐다. 나에게 '아로하'는 가수 쿨의 노래이지만 24살 97년생 그에게는 조정석의 노래인 우리는 그런 나이차이를 가졌다.


턱이 각진 그는 우락부락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운동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생 때까지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글에서는 차분함이 묻어 나왔다. 얌전한 그는 드립을 되받아 치는 센스도 있었다. 드립력이 없으면 말 한마디 끼어들 수 없는 글쓰기 모임에서 막내임에도 기죽지 않고 조용한 드립으로 맞섰다. 힙합 유튜버인 그는 일주일에 영상을 하나씩 올리는 성실함을 장착했다. 그 영상 또한 일목요연 유익하고 유머러스했다. 3천 명 구독자를 1년 만에 얻었다고 한다. all A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한국에 와서는 래퍼가 됐다. 음악도 고시공부마냥 성실하게 해내었다. 일주일에 하나씩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성실하고 차분하며 센스 있는 그를 바람직한 청년으로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영어과외를 알바 삼아 하고 있는 그에게 영어과외를 시작했다. 그러다 묘한 기류가 흐르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호감을 보인 것은 5년 만이었다. 28살에 3년 반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는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끝도 없는 자아성찰이 시작됐는데 그때 알아차린 내 중요한 특징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 빠순이로 불리던 아이돌 열성팬이었다. 좋아하던 god의 숙소 앞에 죽치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멤버인 윤계상 아버지가 하는 갈빗집과 카페에 찾아갈 정도였으며 음악 방송에 들어가려고 새벽부터 줄을 설 정도였다. 누군가를 한번 좋아하면 푹 빠지는 덕후 스타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남자친구들에게는 그렇게 덕질을 한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덕질 유전자를 발동시켜 줄 남자를 찾겠다는 생각에 강제로 연애를 오래 쉬게 된 참이었다. 좋아할 만한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5년 만에 34살이 되어서야 겨우 좋아할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10살 어렸다. 황당했다. 아아, 내 인연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없었나 보다.


10살 어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은 나에게도 꽤 충격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대다수가 이해가 안 간다, 말이 안 된다 놀라며 반대했다. 멋있다, 대단하다, 응원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멋있다고 말하면서도 '나 같으면 절대 안 할 행동인데'가 행간에 숨겨져 있음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이에서 오는 처지 차이를 우려했다. 불분명한 그의 미래 때문이었다. 음악을 하고는 있지만 잘 되고 안 되고는 그가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성공해도 그의 인생은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지 않아 음악을 그만둔다고 해도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반면 직장 10년 차인 내 미래는 어느 정도 많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 같은 삶을 걸어갈 가능성이 80% 이상이고 기껏해야 이직 정도였다. 안정적인 것을 최고로 여기는 내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제 발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 큰 난관이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미필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요즘 군대가 짧아졌다지만 1년 반이나 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은 당시 34살이던 내게 큰 리스크였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콕콕 박히는 나이도 지났다. 만의 하나 헤어지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그는 아직도 창창하다. 다른 여자 다섯 명도 넘게 만날 수 있는 나이다. 나는 마흔이 더 가까운 나이로 헤어지면 늙고 병들고 내 곁에 남은 건 주름밖에 없을 나이였다. 한 살 한 살이 소중한 혼기가 꽉 차 터지기 일보직전의 30대 여성이 바로 나였다.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의 가치는 달랐다. 나를 정말로 아껴주는 사람들은 뜯어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답정너였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안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반대하고 주저하는 이유는 모두 바깥에서 나왔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늘 행복의 기준을 남의 것으로 살아서 불행했다. 전공도 직업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택했기보다는 부모님이, 사회가 좋다는 것을 선택했다. 선생님이 되거나 대기업에 취업한다는 사범대에 들어가서 현재 고통을 느끼고 생각했다. 이전 남자친구를 덕질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은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좋은 감정보다는 어느 학교 이상은 나와야 되고 남들이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을 외모여야 했고 옷도 못 입으면 안 됐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에 의해서 선택한 게 아니라 특정 외적 기준에 가둬놓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을 골랐다. 그와의 결과는 좋지 않았고 이는 처음부터 스포일러 가득한 결말이었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그 감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지 않았던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 나의 20대 연애였다. 그래서 내 안의 소리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행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그만하고 싶었다.


35살이 된 2021년 1월 1일부터 그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더없이 행복한 1년을 보냈다. 2022년 1월 3일 그는 군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는 입대 며칠 전 그보다 먼저 이병이 되었다. 고무신 카페를 가입했다. 등업 필수 조건인 글 하나와 댓글 다섯 개를 달고 이병으로 등업 신청을 했다. 20대 초반에도 안 해본 고무신 카페 등업은 민망했다. 30대에 면회 갈 일은 교도소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이렇게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입대하고는 손 편지 5개, 70개의 인터넷 편지를 썼다. 매일 1500자의 인터넷 편지를 쓰는 것은 힘들었다. 30분이 넘게 걸렸다. 자기 전 누워서 손을 뻗어 쓰다 보니 쥐가 났다. 26살만 됐어도 혈액순환이 잘 됐을 텐데 싶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10년 차 직장인의 신분으로 매일매일 편지를 써 내려갔다. 훈련병이 된 그는 내 편지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창구였고 편지 읽는 게 낙이라고 했다. 편지를 받았을 때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단 하루도 빼먹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10분 허락되는 전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말에는 휴대폰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훈련소 45일이 지나갔다. 이제는 4주간의 후반기 교육이 시작됐다. 이것만 끝나면 자대로 이동한다. 제대까지 499일 남았다. 요즘은 전역일 계산기가 잘 나온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시간은 점점 초단위로 줄어들고 있다. 오늘까지 전체 군대 기간의 8.6%를 달성했다.    


10살 어린 미필자와의 연애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했으면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나이에 고무신이 되는 것에 대한 다른 사람의 시선은 차갑디 차갑다. 그리고 웃프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행복을 찾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36세 곰신으로서의 생활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선택했고 좋아해서 선택했기 때문에 군대를 기다리는 것 또한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될 것 같다. (물론 장담은 못한다.)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줄 것 같다. 내 선택에 의한 경험은 역시나 불행보다 행복에 더 가깝게 한다. 무엇보다 나를 좀 더 어른과 비슷하게 만든다.




이 글은 2년 전에 쓴 글입니다. 당시 수강하던 글쓰기 수업의 과제로 썼던 글이에요. 조금 더 저와 가까운 브런치를 만들고 싶어서 서랍 속 간직해 두었던 글을 올려봅니다. 문득 제 브런치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냥 올려봅니다,,, 브런치 밖의 저는 시니컬하긴 해도 늘 재미있고 유쾌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인데 제 브런치가 재미없는 것은 좀 별로더라고요! 재미있는 글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유머러스한 글을 쓰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ㅠ_ㅠ


한편 글 속 패기와는 달리 글 속의 주인공과는 헤어진 지 오래되었어요..ㅎ 그분은 전역을 해서 새로운 삶을 살테고 저는 예상대로 나이와 주름만 얻었네요. 병은 안 들어서 다행,,,ㅎ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주도적으로 얻은 주름이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ㅋㅋ 다 지르고 아쉬움 없는 점이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ㅎㅎㅎㅎㅎ 그리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사람이었기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현실의 제 삶은 심각하기보단 시트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데요, 앞으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재미있는 제 일상 속 이야기도 꺼내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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