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를 불신하는 밀레니얼이 힙합을 믿게된 이유
고등학생 때 유행했던 것들이 있다. 레스포삭 가방, 아베크롬비 티셔츠, 쎈수학 문제집, 그리고 <시크릿> 책이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금세 베스트셀러가 됐다. 읽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발동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 열풍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 허울뿐인 이야기로 느껴졌다. 현실적이며 의심이 많은 성격 탓일 테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믿지 않았다. 이런 유의 책은 보통 사람의 마인드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목적을 둔다. 내게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인 생각을 요구했다. 되리라 생각하고 말하고, 벽에 붙여 놓고, 감사 일기를 쓰라는 등의 행동지침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그 근거로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런 설득의 조각들이 탐탁지 않았다. 인과관계나 선후 관계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먼저인지, 성공 비법이 먼저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믿지 않는 편이 내게 더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내가 자기계발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직업을 가진 것은 아이러니하다.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그룹 인재개발원에 취직했다. 직장인들은 알겠지만 회사에서 하는 교육은 크게 직무교육과 리더십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직무교육은 업무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교육이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OA 교육이거나 영업, 회계 같은 교육들이다. 이런 교육들은 교육담당자가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교육은 아니다. 잘하는 강사만 섭외하면 그만이다.
내가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할 교육은 리더십 교육이었다. 리더십 교육은 보통 자기 계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교육들로 직원들의 마인드, 행동까지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불행하게도 가장 싫어하고 도무지 설득되지 않는 일이 직업이 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이러한 콘텐츠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다. 자기계발서에 살을 붙여 교육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러려면 다양한 자기계발서를 섭렵해야 했다. 퇴근 후 서점에 들러 자기계발서를 둘러보곤 했다. 위기가 분명했다.
교육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은 사례싸움이었다. 어떤 이의 성공방정식이나 자연, 사회의 현상 등을 삶이나 업무 환경에 적용해야 했다. 예를 들어 셀프리더십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강점인식’이다. 사례의 단골은 김연아였다. 그녀에게는 타고난 재능을 정확히 찾아준 어머니, 승부욕, 철저한 마인드콘트롤 능력이 있었다. 교육생들 또한 강점을 정확히 알고 발휘한다면 업무적으로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전혀 와 닿지 않았다. 김연아는 그 재능을 어렸을 때 찾았고 피겨스케이팅은 대단한 인생의 과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업무에서 내가 발휘해야 할 것은 엄청난 강점이 아니었을뿐더러 강점을 발휘할 기회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김연아가 한 것은 일이 아니고 훈련이었다. 훈련과 일은 다르게 느껴졌다.
아웃라이어 ‘1만 시간의 법칙’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빌 게이츠는 13살부터 하버드를 중퇴한 대학 2학년까지 프로그래밍을 1만 시간 연습했다. 이렇게 노력해도 직장인으로서 빌 게이츠 급의 성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좀 더 친숙한 대중문화 사례 역시 공감되지 않았다. 비틀즈는 독일 함부르크 클럽 '인드라'에서 1년 6개월 동안 270일 밤 연주를 통해 실력을 연마했고 10년간 연습했다고 한다. 언제적 비틀즈인지 전래동화같이 느껴졌다. 히딩크 리더십, 이순신 리더십 등 모든 것이 그랬다. 물론 최근의 교육콘텐츠 사례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박막례 할머니, 대도서관 등 조금 더 친숙한 일반인의 성공사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미 대단한 성공을 거둔 그들은 이미 나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데 내로라하는 자기 계발적 사례에도 꿈쩍 안 하던 나를 움직인 것이 바로 힙합이었다. 힙합의 '허슬'(열심히 노력한다는 의미) 문화는 나의 퇴근 시간 이후와 주말을 꽉 채울 정도로 열심히 살게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어떤 생산물을 내고 싶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런 열심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었다. 노력하면 성공하고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힙합으로 생긴 것이다. 힙합에서는 많은 래퍼가 나처럼 힙합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래퍼뿐만 아니다. 힙합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팬 중 많은 이들이 그렇다. 이런 것이 동기부여고 자기계발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 힙합적 자기계발이다.
힙합에 대한 믿음은 힙합 고유의 특성이 ‘솔직함’인 것에서 비롯됐다. 힙합에서는 가사를 래퍼 자신이 직접 써야 한다. 그리고 그 가사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암묵적인 룰이다. 힙합에서는 가짜 겸손보다 진짜 자랑을 높이 친다. 다음 가사에서 느낄 수 있다.
“저는 랩과 돈을 좋아하는 30대 아저씨입니다.”
- 염따 <돈 Call Me>
“엄마 아들은 자퇴생인데 옆방에 서울대 누나는 나를 보면 어떤 기분이신가요.
어디서 얘기 꺼내기도 쪽팔리신가요.”
- 빈첸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변이나 늘어놓을 이런 Big shit 코 막어
일단 쇼미는 솔직히 회사에게 보여주기식
사장으로서 Do somethin' do somethin'”
- 사이먼 도미닉 <Me No Jay Park>
이런 가사들은 래퍼들의 삶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소상히 알려준다. 부단한 노력, 성공, 실패, 개성, 생각, 돈 모든 것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힙합이다. 그래서 힙합의 성공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투명하게 눈에 보인다. 한 아티스트에게 뒤늦게 빠졌더라도 그의 음악 세계와 삶, 성공 전후에 대해 알 수 있다. 과거에 쓴 가사들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게 된 힙합의 성공 문법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힙합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래퍼들의 삶은 힙합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성공한 래퍼중 한명인 더 콰이엇은 힙합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했다. 낳고 기르신 분은 엄마지만 힙합과 만난 열다섯 살 때부터 힙합이 본인을 키웠다고 말한다. 당시 그와 그의 가족에게 힘든 시기였는데 힙합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힙합은 반드시 무언가를 많이 바꿔 놓는다고 말하고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 달라고 했다.
힙합의 성공 문법, 래퍼들이 힙합에서 받은 영향력은 선언적이기보다 귀납적이다. 노래 한 곡 한 곡, 래퍼 한 명 한 명이 현재 진행중인 사례다.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다. 힙합이 누군가의 마인드와 행동에 변화를 준다는 것을 더 신뢰하게 하는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글로만 말하는 자기계발서와 힙합을 다르게 느끼는 이유다.
낙차가 커 주는 울림이 큰 것 또한 힙합이 와닿는 점이다. 래퍼들의 삶은 바닥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 게토(빈민가)에서 시작한 힙합은 가난과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흑인들의 몸부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말 그대로 Bottom to the Top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할렘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많은 래퍼가 힙합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힙합 레이블 ‘일리네어’의 도끼, 더콰이엇으로 대표되는 ‘Money Swag’, 염따의 ‘FLEX’는 이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시작은 바닥이었고 많은 아티스트들의 시작점 역시 그렇다. 0 혹은 마이너스라는 시작점이 명확해 성공 전후의 낙차가 크다. 그만큼 그들의 성공이 더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에도 드라마틱하게 꽂혔다.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이끄는 힘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 자신부터 제대로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리더십의 다른 말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이런 점에서 래퍼와 힙합 팬에게 긍정적 영향을 준 힙합에도 ‘리더십’을 붙일 수 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문화이자 에너지를 주는 영향력, 분명한 리더십이다. 래퍼, 힙합 팬, 그리고 나.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자 밀레니얼 세대의 일부다. 직장에서 연구대상이고, 답답함에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은 인간군상이다. 이들을 힙합이 움직였다. 이들의 마인드와 행동을 바꾼 힙합의 비결은 무엇일까? 찬찬히 증명해보고자 한다. ‘Show and Prove’ 역시 힙합이니까.
* 퇴사하고 카카오 이모티콘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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