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김민지
1992년생 김민지는, 그러니까 2021년 올해로 서른이 되었으며 어느 무리에나 하나씩은 있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민지들 중 하나인 김민지는 높고 두터운 채용 시장의 벽을 느낀 지 오래였다. 하고 싶은 일이 이제야 생긴 것이 김민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에, 성별 때문에, 외가, 친가, 사돈의 팔촌을 다 뒤져봐도 이렇다 할 명함을 가진 이가 없기 때문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늦어진 졸업 때문에, 이전 직장들에서 껍데기 경력밖에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취업의 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1mm씩, 1cm씩, 1m씩, 높고 두꺼워졌다. 벽 앞에 선 김민지의 좌절감은 패배감이 되었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존감의 파편들은 긴 생채기를 내며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수수.
김민지는 콘텐츠 에디터가 되고 싶었다. 콘텐츠가 대세로 떠오른 요즘, 채용 사이트 구인란, 어느 직종에서든 볼 수 있는 것이 콘텐츠 에디터 직군이다. 누군가 지원서는 백 개를 넣어도 과하지 않다고 했는데, 많은 구인공고 중에서 고르고 골라 오십 개 정도 넣은 김민지의 신중함이 과한 것이었을까. 면접의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어렵게 면접을 보게 되어도 김민지와 회사 양쪽 모두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취업 전쟁. 실패의 최루탄이 터지는 현장에서 김민지의 생기가 희미해져 갈 무렵, 바닥을 더듬는 김민지의 손을 누군가 잡아 일으켰다.
“김민지 씨, 당신의 글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원하시는 연봉 맞춰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일하시죠.”
독립출판물을 출간한 경험이 있는 김민지는 그 책의 글귀들을 엮어 SNS에 올린 적이 있었다. 지원서에 기재된 SNS 주소를 통해 김민지의 글을 보게 된 인사 담당자가 지금 그녀에게 채용 통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홍보 목적으로 올린 SNS 피드가 어쩌다 이 정도의 감화, 감동을 준 것인지 김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연봉과 직급이라는 좋은 조건과 더불어 자신의 글까지 인정받으니 김민지는 이것이야말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김민지는 채용담당자, 신 부장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때만 해도 김민지는 몰랐다. 지금 덥석 잡은 그 손이 구원의 손일지, 훼멸의 손일지.
김민지가 입사하게 된 곳은 광고회사였다. 나름 우량고객들을 광고주로 모시고 있는 광고회사에서 김민지는 신 부장의 팀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김민지는 한 우량 광고주의 언론 파트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업무와 달랐음에도 괜찮았다. 하다 보면 원하는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근 첫날, 김민지가 회사 소개를 받는 동안 신 부장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났지만 김민지는 개의치 않았다. 입사 첫날이라 정신이 없기도 했고, 신 부장의 늦은 출근을 신경 쓸 만큼 김민지의 마음이 유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의 긴장과 적당한 희망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던 김민지였다. 신 부장은 다음날도 11시가 넘어서야 등장했다. 출퇴근 지문 인식 기계가 없는 연유가 짐작되었다.
출근 3일 차, 신 부장이 김민지를 따로 불렀다. 신 부장이 김민지에게 준 첫 업무 지침은 앞으로 김민지가 직접 광고주와 소통하면서 언론보도를 해나가라는 것이었다. 광고회사도, 언론보도도 처음인 김민지는 팀장의 검토, 결재 없이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받아들였다. 김민지는 회사의 좋은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되고 싶은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이다. 출근 7일 차, 김민지는 신 부장, 옆팀 유 부장, 상임이사와 회식 자리를 가졌다. 술도 들어갔겠다. 편한 분위기 속에서 김민지는 7일 동안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저 그런데.., 근로 계약서는 언제 쓰나요?”
“에헤이, 김대리. 월급 나올 때 되면 다 써. 걱정 마. 그건 정말 신경 쓸 필요 없어.”
상임이사의 호쾌함에 김민지는 맥주 한 모금과 함께 찝찝함을 목 뒤로 넘겨버렸다.
출근 10일 차. 광고주의 언론보도 요청이 왔다. 김민지는 오전 내내 그 일에만 매달렸고, 점심시간 직후 김민지가 작성한 기사문이 언로사에 배포되었다. 누구의 검토, 결재도 없이 언론사에 뿌려지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김민지로서는 혼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언론에 기사문이 보도되고 20분 뒤, 광고주로부터 전화가 왔다. 덧붙여선 안 될 내용이 추가되어 기사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민지는 당황스러웠다. 잠시뿐이었던 교육이었지만, 신 부장이 알려준 팁대로 작성했을 뿐인데 큰 사고가 터진 것이다. 옆 팀 박 대리가 수습을 위해 각 언론사에 전화를 돌렸고, 김민지는 요청한 수정 내용이 반영되었는지 떨리는 손으로 포털 사이트를 시시각각 모니터링했다. 며칠 전, 걱정되는 마음에 공기업에서 언론홍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에게 연락해서 업무에 대해 배울 때만 해도 이런 주의사항은 없었다.
1분 1초가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박 대리 덕에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사고는 수습되었다. 입사 열흘 만에 지옥을 맛 본 김민지는 광고주에게 전송될 일일보고서라도 흠 없이 작성하고자 ppt작업에 모든 정성과 수고를 쏟아부었다. 김민지가 정성을 쏟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5시 50분. 문제의 광고주를 만나고 온 유 부장이 김민지를 회의실로 호출했다. 된통 깨질 것을 예상한 김민지는 깊이 사죄할 각오를 하고 유 부장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 앉았다. 광고주에게 심하게 시달렸는지 팔자주름이 더욱 패인 유 부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바짝 마른 입술과 실핏줄이 터진 유 부장의 눈을 보자, 김민지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유 부장의 기색을 살피는 김민지와 달리, 어색하게 회의실 주변만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유 부장은, 심호흡을 크게 내쉰 뒤, 말을 꺼냈다.
“김대리, 본인 생각엔 우리 회사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아직 열흘밖에 되지 않아서 적응 중이지만, 잘 해내기 위해서 노력 중에 있습니다. 오늘 큰 사고를 친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김대리 잘못은 아니죠. 업무 편달 제대로 못한 우리 잘못도 있으니까. 음.., 면접 볼 때 내가 말했던 것 기억나요? 수습 기간 동안에는 서로 안 맞으면 우리가 내보낼 수도, 본인이 나갈 수도 있다고 했던 거.”
“네.. 기억합니다. ”
“오늘 사고가 있었지만, 어쨌든 수습은 되었으니까 다행이에요. 말했다시피 그 부분은 김대리 잘못만은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 복귀하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김대리와 우리가 잘 맞는 것인지. 이런 말하기 힘들지만, 서로 인연이 아니지 않나 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네? 저 지금 자르는 거예요?”
이 대답은 푹 찌르니 나온 피였다. 평소 김민지는 감정을 먼저 느끼고, 이성으로 정리한 뒤에 말을 꺼내는 성격이었다. 30년 동안 겪어보지 못한 일에 김민지의 대화 메커니즘도 고장이 나버렸다.
“아. 아뇨. 그런 말은 우리 하지 마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너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네? 잘리는 건 저인데, 부장님이 왜 눈물이 나요. 눈물을 흘려도 제가 흘려야지. 부장님, 이건 아니죠. 갑자기 이렇게 사람을 길거리로 내모는 건 아니죠.”
개떡이었다. 유 부장 입에서 나온 저 말들이 개떡이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이 개떡이란 말인가. 김민지는 그 개떡을 물고 화가 났다. 화가 나면서 침착했다. 유 부장이 싸지른 개떡만큼이나 이상한 상황이었다.
“미안합니다 김대리. 정말 미안해요.”
“부장님. 저 이렇게 잘리면 안 돼요. 갚아야 할 빚도 많고, 여기 오기 위해서 제가 다른 회사도 마다하고 왔는데,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유 부장은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미안하다는, 이 시간을 빨리 끝내고자 하는 고장 난 말.
“부장님. 이런 방식은 정말 아닙니다. 다른 방식을 강구해주세요. 지금 회사에서 저한테 이러는 거, 제가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아시죠? 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참을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김대리.. 일단, 제가 이사님께 보고 드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온 김민지는 마무리가 덜 된 일일보고서를 대강 얼개만 맞추어 박 대리에게 넘겼다.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열흘밖에 쓰지 않은 자리라서 챙길 짐도 많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닥이 눈앞까지 올라왔다 내려갔다. 현기증이었다. 물결치는 머릿속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렵사리 짐을 챙기는 김민지 뒤로, 프라이머리의 시스루가 들려왔다. 신 부장의 노랫소리였다. 미친놈. 김민지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홍대입구역. 금요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지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김민지는 허망한 금요일의 성배를 마셨다. 독에 취하기도 전에 김민지는 전화를 받았다. 퇴근길이냐며 밝게 묻는 친구의 전화.
아니 친구야. 난 퇴근길이 아니라 퇴사 길이란다.
“미친놈, 장난하지 마.”
아니 친구야. 진짜야. 나 방금 잘렸어. 오늘 사고를 쳤거든. 그래서 잘렸어.
김민지의 허무함이 LTE를 타고 친구에게로 옮겨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귀에 핸드폰을 댄 채로, 입 속에는 길 잃은 자음과 모음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