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트 열세 번째 페이지
해고 이후 첫날은 토요일이었다. 평일이었더라면 해고가 더욱 실감이 났을까. 아무 일 없이 남들과 똑같이 쉬고 있는 이 시간 속에서 해고당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의 폭풍이 쓸고 간 마음밭의 자리는 휑뎅그렁하였다. 그러나 다른 직장인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날이 주는 같은 직장인 집단이라는 가짜 동아줄이 김민지를 옭아매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또한 주말이었다. 매주 교회에 나갔지만, 이날 만은 침대 위에서 주님을 찾고 싶었다.
어제의 가짜 동아줄도 소용없었다. 난생처음 당하는 해고에, 첫 남자 친구에게 차였던 그날처럼 울었다.
마음의 평수보다 큰 상황을 받아들이려니 마음이 찢어졌다. 베갯잇은 눈물에 젖어버렸다. 이 눈물에 속상함과 아픔까지 베여 나온다면 좋겠다.
해고 이후 3일째, 월요일. 해고 이후 김민지에게 사과던, 처우 문제던, 전화를 주기로 한 부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김민지는 아직 업무 단톡방을 나오지 않았다. 언론 파트에서 또 문제가 터졌는지, 광고주 측에 대해 비우호적 기사를 낸 기자의 신상과 사건 수습에 대한 보고로 카톡이 연이어 울렸다. 아마 이 일로 부장은 정신없으리라. 이미 해고된 김민지 대리 한 명쯤은 안 중에도 없었으리라.
당장 굶어 죽게 생긴 자신의 억울함 같은 것은 저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김민지는 별안간 화가 치밀었다. 지난 이틀 동안 겪은 슬픔과 분노를 합친 것만큼 분노했고,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회사로 옮겨지자, 이것은 행동할 추진력이 되었다.
삼일 만에 목욕재계를 했다. 깨끗해진 몸과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두 부장과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캡처했다.
취업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 부장의 메시지, 근무했었다는 증거가 될 업무 메시지들, 부당하게 해고되었다는 정황이 보이는 윤대리가 보낸 위로의 메시지. 캡처된 메시지 수만큼 든든해진 마음이었다.
난생처음 당한 해고였고, 난생처음 노동청에 상담 전화를 했다.
김민지의 읍소에 상담원은 어조와 단어 하나하나에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말로 상담을 이어나갔다.
김민지가 한 둘이 아니었을 텐데, 오늘도 이 김민지 1부터 시작해서 퇴근까지 수많은 김민지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눌 상담원의 친절은 프로페셔널한 것이었다. 프로페셔널한 안내로, 김민지는 회사 주소지 관할 노동청에 가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부에 무작정 가려고 했던 계획에 앞서 전문가와의 상담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 한 통만으로도 내 편이라는 생각에 김민지는 또 불쑥 왈칵했다.
서울 서부 고용복지센터.
김민지의 경우, 사대보험 미가입에 대한 것을 진정 제기할 수 있었다. 부당해고 건은 서울 노동위원회를 찾아가야 했다. 동네 구청만큼 많은 민원인들이 있었고, 민원인들의 사연은 모두 김민지의 사연이었다.
많은 김민지들을 위한 해고 건은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 가야 한다는 안내문이 친절한 약도와 함께 붙어있었다. 안내문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나오며 김민지는 숨을 크게 몰아 쉬었다. 구청에서 등본 떼는 사람보다 진정 제기하는 사람 수가 많아 보이는 풍경에 공감보다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숨을 크게 몰아 쉬어야만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대문구에서 공덕역으로. 역에서 올라 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한 아파트 앞 공원이 있었고, 공원을 가로질러 가니 서울지방노동위원회가 나왔다. 너구나. 나를 위해 판결해 줄 이가.
고용복지센터는 고층건물의 일부 층을 사용하고 있어서 오피스 느낌이었다면, 독채 건물의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법원과 같은 위용까지 느껴졌다. 노동 쪽의 삼권분립 같은 것일까.
복지센터와 비교해 콤팩트한 구조의 민원실과, 더 적은 민원인 수 때문에 김민지는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부당해고 사연을 듣게 되었다. 대기업 계약직으로 들어갔다가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해고된 20대 여인, 건설현장에서 수개월 일하다가 하루아침에 잘리게 된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김민지들의 사연을 통해 김민지는, 개선된 노동법, 노동권 그리고 이를 대변하는 노동위원회 독채 건물의 위용에도 존재하게 되는 노동 사각지대에 떨리는 한숨을 뱉었다.
진정서를 제기하고, 앞으로 진행될 사건 처리 과정을 듣고 나온 김민지의 머릿속에 직원의 말이 어지럽게 유영했다. 집중하고 이해하기 힘든 상태였다. 갑자기 내가 이해력이 떨어졌나. 아니면 원래 이 정도의 머리라서 해고까지 된 건가. 유영하는 단어들 대신 쓸데없는 자기 소모적인 생각만이 가라앉았다.
여름이었다. 뙤약볕과 습기로 땀이 저절로 흐르는 서울 한가운데서, 김민지는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하니,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 것도 아닌데 소름이 돋고, 그저 고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