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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보라 Feb 01. 2022

[해고노트] 두 번째 페이지 : 임금체불 (3)

디자인 팀의 단체 태업은 대표가 어떤 설득 전략을 썼는지, 일단락되었고 4대 보험 대납을 해주겠다는 진흥원의 사보 디자인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OO대학교 사보였다. 평사원 지훈 씨가 담당하던 OO대학교 사보는 지훈 씨의 퇴사로 급한 대로 팀장이 맡아서 진행됐고, 원고는 데드라인에 아슬아슬하게 마무리되었다. 디자인 업무를 겸하는 마케팅 팀 직원이 시안 작업에 들어갔고, 1차 교정이 있던 날, 또다시 밀려버린 월급에 그 직원이 퇴사를 감행했다. 말 한마디 없이, 핸드폰도 꺼둔 채,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안 그래도 우중충했던 사무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까지 했다. OO대학교 담당인 팀장은 잔뜩 성난 얼굴로 모니터만 바라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온몸이 분노로 가득 차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맡은 일은 다 끝내야지. 이건 엿 먹으라는 거야 뭐야."


김민지는 생각했다. 

대표가 자기가 맡은 임금 지급이라는 기본 업무를 다 하지 않는데, 직원이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이미 임금체불이라는 빅엿을 먹은 직원이 이 정도 작은 엿은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다만, 퇴사를 감행한 그녀의 의도와 달리 이 작은 엿은 대표가 아닌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엿은 그녀의 퇴사가 아니라 이런 거지 같은 시스템에 있는 것이었다. 이런 엿같은 시스템.

김민지는 벌써 받지 못한 월급이 2개월 하고도 3주 치가 되었다. 이달 말은 추석 연휴가 있었고, 모든 작업은 연휴 전에 마무리되어야 했다.  김민지는 월급이 밀린 채, 열흘이나 앞당겨진 원고 마감일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던 김민지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볼과 입 주변 피부에 각질이 올라와 엉망이 된 자신의 몰골이 보였다. 평생 동안 보아 온 얼굴 중에 가장 보잘것없어 보였다.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 문 앞에서, 팀장과 맞닥뜨렸다. 옥상에서 막 내려온 그에게서 지독한 담배냄새가 풍겼다. 김민지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잡았다.


"팀장님, 잠시만요. 저, 추석 전까지 일 못할 것 같아요. 야근이랑 주말출근이 불 보듯 뻔한데, 이 상황에 감당하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얼마 전 영상팀과 함께 출장을 가게 된 김민지는, 오래간만에 다른 팀원들 사이에 혼자였다. 영상팀의 막내는 곧 퇴사를 앞두고 있다며, 김민지에게 새 직장 알아볼 것을 권했다. 영상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기본기는 익혔으니 다른 회사 들어가서도 금세 적응할 것이고 하루빨리 정리하라는 이야기였다.

기획팀 바깥에서의 이야기는 팀 내에서 도는 이야기와 사뭇 달랐다. 굴레에 빠진 김민지에게 이건 아니라는 각성의 메시지였다. 영상팀은 직접 기관들과 컨택하며 일해야 하는 기획팀 업무 특성상, 바로 발 빼는 게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지나칠 정도로 미련하다며 김민지의 팀장과 팀원들에 대해 평했다. 맞는 말이었다. 김민지는 이 미련한 짓거리를 계속할 수 없었다. 

회의실에서 처음 대화 나눴을 때보다도 더 강경한 김민지의 태도에 팀장의 얼굴이 힘이 빠져 쭈욱 내려갔다.  


"김 주임. 추석 때까지만이라도. 응? 맡고 있는 일 중에 도저히 안 되겠는 것들은 내가 몇 개 가져갈게."


"그렇게도 하기 싫어요. 추석 지나서도 월급 어차피 안 나올 텐데요."


"소액체당금 제도라고 있어. 그거 알아봐. 노동부에 신고하면 국가가 체불된 임금 선지급해주는 건데, 지금 그만두나, 며칠 더 하나, 대표한테 받는 건 글렀고, 체당금 신청해야 돼. 며칠 더 하면 체당금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 더 커지잖아. 김 주임. 나 너무 힘들다 진짜. 알잖아 내 상황. 이런 나도 끝까지 하고 있는데, 김 주임 좀 도와줘라. 마케팅 팀 그 여자처럼 하지는 말자고 우리. "

 

그래서 김민지는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고?

이미 소액체당금 제도에 대해서 알아보고, 진행하고 있는 영상팀 막내의 조언을 듣고, 같은 팀 김 대리와 상황을 공유하며 서로의 퇴사일을 조정했다. 누가 먼저 나가느냐에 따라 피해를 더 볼 사람이 생기기에, 최대한 서로에게 피해 입히지 않는 선에서 정한 퇴사일이었다. 체당금으로 며칠 치라도 임금을 더 받기 위해 김민지와 김 대리의 퇴사일은 추석 이후가 되었다. 추석 연휴 3일 뒤에 김 대리가, 일주일 뒤에 김민지가 퇴사하기로 정하며, 김민지의 퇴사일은 추석 전까지 팀장에게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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