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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보라 Jan 31. 2022

[해고노트] 두 번째 페이지 : 임금체불 (2)

임금이 밀린 지는 꽤 되었단다. 팀장급들은 어제부로 딱 10개월치 월급이 미지급되었다고.

김 대리는 두 달 전, 퇴사 의사를 밝혔으나 대표와 팀장의 간곡한 부탁과 세 달 내로 밀린 임금을 모두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고 평사원인 지훈 씨는 이 달 말 퇴사가 확정되어 있었다. 임금체불 사태가 곪을 대로 곪은 상태에서 김민지를 뽑은 것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팀장님, 죄송한데요. 월급 안 받고는 일 못하겠습니다. 저 달마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것들도 있고요. 이렇게는 못 버텨요. 당장 이번 달 카드값도 못 내게 생겼는데요? 일은 일대로 하다가 신용불량자 되겠어요."


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숨으로 땅이 꺼질 수 있다면 누구보다 길고 크게 내쉬고 싶은 건 김민지 본인이었다. 


"대표가 벌인 다른 사업이 안 좋아졌대. 마스크 사업 이래나. 그게 인도네시아 쪽으로 납품이 돼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대나 봐. 그 문제 해결한다고 기다려 달라고 한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 문제는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다 부질없는 일인 것 같고. 다음 달 되면, OO시청이랑 OOO진흥원에서 돈이 들어올 거야. 그게 들어오면 직원들 월급 정도는 충당 가능할 거야. 내 계산으로는."


OO시청, OOO진흥원은 평사원 지훈 씨와 김민지가 담당하고 있는 업체였다. 진흥원에서 사보 돈을 주건 말건 김민지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김민지가 입장 변화를 보이지 않자, 팀장은 일단 알겠으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회의실을 나갔고, 곧장 대표실로 들어갔다.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대표실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뒷짐 진 채 서서 대표에게 말을 전하는 팀장, 책상에 앉아 뿔테 안경을 고쳐 써가며 듣는 대표. 짧은 대화가 오갔다.


"김 주임, 대표도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김 주임 입장 말했어. 대표가 들어와 보래."


대표실을 나온 팀장의 말에 김민지는 바로 일어나 대표실 문을 열었다. 입사 날 이후 처음이었다.

대표는 사람 좋은 미소로 김민지를 맞이하며 소파로 안내했다. 냉철한 커리어우먼처럼 보였던 입사 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최대한의 친절함을 끼얹고, 다정함을 있는 대로 껴입은 듯한 대표의 몸짓이 부자연스러워 보는 사람이 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김 주임. 최 팀장한테 다 들었어요.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미안해 내가. 월급을 줘야 되는데, 지금 회사 사정도 좋지는 않네. 마스크 사업이 맞물려있어서, 그게 풀리면 바로 자금이 도니까 돈을 줄 수 있거든. 그 일이 풀린다 풀린다 하면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줘. 열흘 내로 내가 다 해결할게. 정말이야. 그때까지만, 힘써줘. 부탁할게."


대표가 열흘을 약속했다. 아직 산전수전밖에 겪지 않은 김민지는 공중전까지는 경험해보지 않아서, 때가 덜 묻어서, 지금까지 일한 3주가 아까워서 열흘을 더 버텨보기로 했다. 이날, 팀장은 퇴근 후 김민지에게 소고기를 사 먹였다. 소고기에 술까지 곁들인 자리에서, 김민지는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말해주지 않은 팀장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쳤고, 팀장 또한 김민지에게 사과하며 개인사까지 밝혀 오히려 김민지를 미안하게 했다. 그의 개인사란, 아내 분께서 암으로 투병 중이고, 어린 자녀들을 혼자 케어하고 있다는 사정이었다. 김민지를 말을 잃었다. 그녀 또한 암으로 고통받던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이날의 술자리는 서로의 마음과 숨겨놨던 사정을 터놓으며 오히려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내는 전우로 발돋움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환의 점을 만든 지 열흘이 지나고, 김민지는 종일 월급 계좌를 확인했다. 이제나 저제나 월급 생각뿐이었다. 오늘을 위해 열흘 동안 야근까지 해가며 원고 마감일을 지킨 김민지였다. 그러나 결국 저녁 6시가 땡 할 때까지 월급은 입금되지 않았다. 종일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던 직원들은 맥이 빠졌고, 마감이 끝난 원고로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디자인 팀은 단체 태업에 들어갔다. 


며칠 전, 김민지는 카드값과 공과금을 내기 위해 임금 체불된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근로복지공단의 대출서비스를 이용했다. 월급이 안 나와서 받는 대출이라니 헛웃음이 나올 힘도 없었다. 이 대출금을 오늘 바로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며칠만 이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꼼짝없이 다음 달에 한 달치 이자를 내게 생겼다. 

팀장은 김민지를 불렀다. 진흥원과 시청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다. 공공기관에서 하청 업체에 용역비를 입금하기 위해서는 업체의 4대 보험 납부 이력을 확인하는데, 직원들의 4대 보험이 미납되어 입금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해진 날짜에 용역비를 처리해야 하는 공공기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팀장에게 수차례 전화한 모양이었다.


"김 주임. 진짜 미안해. 내가 돈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내가 미안하다. 근데, 진흥원 쪽에서 용역비에서 일부를 4대 보험 대납하겠다고 했어. 그쪽도 이 일을 미루고 있을 순 없으니까. 며칠만 기다려 보자."


김민지에겐 새로운 대출이 생겼다. 

일한 지 4주가 넘었다. 처음 3주 임금이 아까웠을 때랑은 그 무게가 달랐다.

대표는 믿을 수 없지만 대납해주겠다는 진흥원의 말은 믿어볼 법했다. 

그렇게 김민지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던 직원들과 같은 굴레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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