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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보라 Jan 28. 2022

[해고노트] 해고노트 두 번째 페이지 : 임금체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여름. 김민지의 이번 계절은 참으로 수고스러웠다.

뙤약볕 아래에서 면접 볼 회사를 찾아 헤매기도, 쏟아지는 폭우에 면접 정장이 다 젖기도 하며 고군분투했다. 취업 뽀개기의 과정은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었다. 면접용 구두에 뒤꿈치가 까이기라도 하면 모든 걸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면접을 본 곳은 여섯 군데. 다행히 이 중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최종적으로 두 곳 중, 하루 뒤에 연락 온 사보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중견급 사보 회사의 기획팀 주임으로 입사하게 된 김민지. 입사 후 첫날 그녀가 요구한 것은 근로계약서 작성이었다. 지난 과거에서 배운 게 있으니 이번에는 눈 뜨고 코베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20년도 전에 회사생활을 시작한 그녀의 팀장은 계약서 작성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는 듯 굴었지만 요구에 응해주었다. 업무 시작 전에 작성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첫날 계약서를 보게 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업무는 많았고, 사내 분위기는 다소 건조했지만 괜찮았다. 입사 전, 사전조사로 부당하게 직원을 해고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확인했으니 그거면 되었다.


다소 무뚝뚝하고 말투가 퉁명스러운 팀장님, 세심한 맞선임, 대화가 잘 통하는 나머지 팀원들과 일을 맞추어가며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갔다. 함께 3주 정도 지내고 보니, 첫인상과 다른 이들의 캐릭터를 알아가는 재미마저 있었다. 강한 인상과 투덜대는 어조로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던 팀장은 보이는 모습만 그럴 뿐이지, 사실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쓰는 마음 약한 사람이었고 다정해 보였던 맞선임은 업무에서만큼은 칼 같은 면모를 보였다. 대체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본모습을 알고 난 후 김민지는 팀장에 대한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꼈고, 또래의 다른 직원들과 달리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김민지를, 팀장님은 예뻐했다.


 오늘의 점심식사는 출장 간 팀장님과 맞선임 없이 나머지 팀원들과 김민지뿐이었다. 회사 근처 맛집으로 알려진 돈가스집에서 안심 가스를 써는 김민지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임님, 월급 들어왔어요?"


김민지보다   아래인,  회사 3  김 대리가 물었다. 계좌를 직접 확인하 않았지만 점심시간 직전 사내 메일로 받은 월급명세서가 콧노래의 근원이었다.


"네. 오늘 월급날이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기본 대신 정식시켰지요~."


능청을 떠는 김민지의 말에 김 대리는 별 반응이 없었다. 당연한 걸 물어보고는, 최대한 장단 맞춰준 사람한테 저런 반응이람. 그렇지만 괜찮다. 무안함보다 기쁨이 배나 더 큼으로.

식당이 맛집인 만큼, 어느새 웨이팅 하는 손님들로 붐볐고, 김민지 일행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10분 정도 일찍 사무실로 복귀한 김민지는 남은 시간을 야무지게 쓰기 위해 모바일 쇼핑몰에 접속했다.

월급날이니 오늘의 쇼핑은 정당할 터였다. 그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둔 아이템들을 훑으며, 아직 이 아이들을 원하는 마음이 유효함을 확인했다. 결제하기 클릭 후, 계좌이체를 위해 모바일 페이 앱에서 '확인'까지 눌렀는데, '띵동' 결제 불가 문자가 왔다. 사유는 '잔고 부족'.

‘무슨 일이지. 내가 결제한 금액이 300만 원이던가.’ 이상함을 감지한 김민지는 모바일뱅킹 앱에 접속했다.

잔고 34,000원. 월급이 아직 안 들어온 것이다. 이 회사는 월급 이체 시간이 좀 늦는 것일까. 슬쩍 총무팀 김 과장의 빈자리를 보곤, 쇼핑몰 결제를 퇴근 후로 미뤘다. 그러나 김민지는 퇴근 후에도 장바구니 아이들의 값을 지불할 수 없었다. 퇴근할 때까지 월급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설마, 이 회사도 미친 회사는 아니겠지. 그러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이미 이 회사는 김민지에게 전 회사만큼이나 미친 회사가 되었고 밤새 김민지 또한 미쳐갔다. 잠을 설쳐 눈이 벌게진 채 출근한 김민지는 팀원들에게 출근인사로 월급에 대해 물었다. 어제 함께 점심식사를 한 두 사람 모두 씁쓸하게 웃었다.


"주임님도 못 받았구나. 그래도 주임님은 신입이라 챙겨줄 줄 알았는데."


김 대리의 말이 이상했다. 어제만 못 받은 사람이라면 저렇게만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임님, 팀장님이랑 한 번 말해봐요."


9시 10분. 3주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던 팀장님은 오늘따라 10분이나 늦었고, 그 10분이 김민지에겐 억겁의 시간처럼 흘렀다. 김민지의 다급한 호출에 팀장은 친한 사이 특유의 툴툴거리는 반응을 보이며 회의실로 뒤따라 들어왔다.


"뭐야 출근하자마자.”


"팀장님. 월급 왜 안 들어와요?"


팀장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그러나 당황스러워하지는 않는 듯했다.


"월급 안 들어왔어? 총무팀 과장한테 물어봐."


침착한 반응, 그 안에 깔린 무책임함. 김민지의 심장박동이 빠르고 크게 뛰었다.


"김대리님도, 지훈 씨도 못 받았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지금 다들 못 받고 있는 거예요?"


팀장은 조용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팀장의 시선은 김민지의 뒤편으로 가 있었고, 김민지는 팀장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긴 침묵 구간이었다.


"지훈이는 못 받은 지 2달 됐고, 김대리는 3달 정도 됐어. 나 같은 팀장급들은 더 됐고."


긴 침묵 구간을 깬 팀장의 말은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었다. 사람이 노동을 제공하고 2달, 3달이나 그 값을 못 받는 일이 있다니. 지금은 노동권이 보장된 21세기 아니던가?


"저는 좀 믿기 힘든데요. 더 오래되셨다뇨. 그런데 어떻게 일을 하세요? 아니, 월급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는 한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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