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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Mar 02. 2021

뼛가루를 먹고 자란 나무 (상)

혜영이 죽은 다음.

눈송이가 나무 아래까지 들이친다.

혜영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눈송이다.

혜영의 뼛가루를 먹고 자란 큼지막한 나무다.


바람이 차다.

찬 바람 사이로 이따금 잉걸의 열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겨우내 꽁꽁 언 땅은 녹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위가 별안간 어두워진다.

승진은 힘없이 주저앉아 두 눈을 감는다.

다시는 떠지지 않기를 바라며.




2016년 7월 7일

: 럭키 세븐


비명을 내지르는 학생들과 어리둥절한 여행자들, 뚝 끊긴 음악과 무수한 말소리. 한여름 열기가 느껴지는 홍대 한복판에서, 승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혜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다. 그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을 끝없이 복기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지만 혜영에게 벌어진 일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애써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1분 15초. 정확히 1분 15초 전으로 돌아가 보자.

한 남자가 인도에서 떨어져 나온 보도블록을 주워들었다. 남자는 승진을 향해 걸어가는 혜영을 발견하고 그녀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그리고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혜영은 쓰러졌고, 와이셔츠에 핏물이 잔뜩 튄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들이 혜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승진은 아무 생각 없이 혜영을 바라봤다.


그 남자가 왜 그랬는지, 그 타깃이 왜 혜영이었는지 역시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들판에 수놓인 작은 꽃을 꺾을 때 당신은 어땠나,

길가에 나뒹구는 캔을 걷어찰 때 당신은 어땠나,

깊은 새벽 잠결에 모기를 때려잡을 때 당신은 어땠나,

멀쩡히 일어나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는 당신은 지금 어떤가.

그것은 그에게 이런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10일

: 글루미 아니, 글로리 선데이


종교적인 이유로 일요일에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한주의 시작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주의 끝. 하지만 승진에게 일요일은 끝이자 동시 시작이었다. 케케묵 승진의 종말이자 새로운 승진의 시작, 그러니까 혜영과 함께했던 인생의 종말이자 해방.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전 6시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수술 후에도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고, 그래서 방금 사망하셨다고. 승진의 눈에 갈쌍갈쌍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승진이 슬퍼서 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울음이라는 행위는 단순한 현상일 뿐이다. 희미하게 남은 하품의 흔적, 눈에 모래알이 들어가서 잠깐 흐른 분비물. 승진의 눈물은 딱 그 정도 의미를 가졌다. 단순히 눈물로는 슬픔도 기쁨도 다른 어떤 감정도 증명할 수가 없다.


승진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멈추려 애쓰지도 않았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판처럼, 얼굴을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그때 승진의 감정이 어땠는지는 승진을 포함한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지난여름 어느 날, 땀을 흘릴 때 내 감정이 어땠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병원에 도착하고서야 안 사실이지만, 혜영에게는 지인이라 부를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혜영의 삶 속에는 그저 혜영과 승진, 둘 뿐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한 명 없이 텅 빈 공간에 단둘만이 마주 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혜영의 죽음은 복잡한 절차 없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직 따뜻한 혜영의 몸뚱이를 확인하고, 병원 부설 장례식장에서 몸뚱이를 바싹 태우고, 남은 뼛가루를 가지고 병원을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혜영의 유골함을 들고 승진이 향한 곳은 둘이 종종 거닐었던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 말고는 마땅히 생각나는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골함을 평생 지니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다나 강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공원 입구에서 경비아저씨가 공원 내 도시락 취식은 금지되어 있다고 따끔히 언질을 주었다. 승진은 절대 도시락이 아니라고, 도시락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음식물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다행히 아저씨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혜영의 뼛가루를 먹을 것도 아니고, 공원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뼛가루를 뿌리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


승진은 유골함에 손을 넣어 재가 된 혜영을 만지작거렸다. 밀가루라기보다는 분필 가루에 가까운 촉감이었다. 유골함에서 손을 빼내자 손가락에 달라붙어 있던 부드러운 가루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혜영은 비가 되고 눈이 되고 결국에는 하늘이 되었다. 길모퉁이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여름 바람에도 이리저리 휘청이는 얄팍한 나무였다. 승진은 나무 주변에 좁은 홈을 파고 남은 뼛가루를 들이부었다. 유골함을 세차게 흔들어 남김없이 비워낸 후에는 이렇게 말했다.

 "무럭무럭 자라라. 자라고 또 자라서 두꺼운 나무가 되어라."


공원을 빠져나온 승진은 대로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땀이 주룩 흐르는 찌는 듯한 더위 속이었지만, 승진은 멈출 줄을 몰랐다. 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고,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했다. 승진은 조금씩 속도를 높여 결국에는 전속력을 다해 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뜀박질을 멈췄을 때는, 조금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로 홍대 한복판이었다. 혜영이 쓰러진 바로 그 자리 위였다.




2016년 9월 14일

: 둥근 달이 떴습니다


혜영이 없는 추석 연휴는 분명 예년과 달랐다. 텅 빈 동내를 굳이 쏘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승진은 여전히 서늘한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혜영의 죽음에 대해, 혜영과 함께했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승진에게 있어서 혜영의 죽음은 마냥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성격과 정상인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집착. 어느 날은 승진의 직장까지 칼을 들고 찾아와 동료 여직원을 협박하기도 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승진이 지금껏 정신과를 찾는 이유도, 약 없이는 정상적으로 하루를 살아낼 수 없는 것도 모두 혜영으로 인해 아로새겨진 공황장애 때문이다.


그렇다고 혜영의 죽음이 마냥 잘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혜영은 지구에 하나 남은 친구이자 가족, 나아가 운명 공동체였다. 말 그대로 혜영과 운명을 같이했던 승진이기에, 혜영이 죽은 날 승진 역시 죽었다.


새로운 승진은 무얼 하며 남은 인생을 견뎌내야 할까.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쳐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픽'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꺼졌다.

"그래, 한 번 더 연체되면 끊긴다고 했지."

이제 와 생각해보니 매달 전기세를 냈던 사람도 혜영이었다.


좁은 반지하 방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새하얗다기보다는 노랗고 뜨거운 달빛이었다. 승진은 달빛을 조명 삼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봤다. 집에만 있는 주제에 뭐하러 멋을 부리느냐고 혜영이 나무랄 것만 같았다. 짧은 탄식과 함께 사고의 흐름은 다시 혜영에게로 집중되었다.


'왜 혜영이었을까?'

그자는 왜 혜영을 죽인 것일까? 특별할 것도 없이 지극히 평범한 혜영을.

나는 왜 혜영을 만났을까? 특별할 것도 없이 지극히 평범한 혜영을.


승진의 머릿속에서는 두툼한 보도블록이 혜영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어지러웠다. 숨이 가빴다. 세븐시스터즈 절벽의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떠밀 것만 같았다.


승진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창문을 열어젖혔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본 하늘에는 비구름이 가득했다. 달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랗게 빛나던 무언가는 다름 아닌 가로등이었다. 씁쓸한 마음에 담배를 몰아 피우는데, 갑자기 서늘한 비바람이 방 안으로 들이쳤다. 붉은 담뱃불이 힘없이 열기를 잃었다. 방 안에 남은 마지막 불빛이 꺼진 것이었다. 야속한 가로등은 승진을 약 올리는 건지, 자꾸 밝게만 빛났다. 너무나 밝고 환하게.




2021년 2월 19일.

: 생일 축하합니다


혜영이 죽은 후로 몇 년 동안 승진에게 2월 19일은 존재하지 않는 날이었다. 달력에서 2월 19일을 오려버렸고, 19일이 속한 주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결정적으로는 18일 저녁에 수면제를 죽기 직전까지 잔뜩 먹고 20일 새벽이 되어서야 일어났으니, 승진의 삶에서 2월 19일은 완전히 삭제되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혜영이 사라진 지도 벌써 몇 해나 지난 2021년 2월 19일 오전 10시, 승진은 홍대 한복판에 있다. 혜영과 같이 불었던 무수한 촛불의 열기가 한데 모여 일렁이는 그 2월 19일이다. 승진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주위를 둘러본다. 별다를 것 없는 평일 오전의 한낮이다. 그러다 문득 홍대 입구 모 빌딩 위에 걸쳐진 전광판으로 시선이 향한다. 따분한 광고가 몇 개 지나고, 바로 오늘 2월 19일부터 빅세일을 시작한다는 모 브랜드의 광고가 떠오른다. 승진은 질끈 두 눈을 감는다. 다시 떠지지 않기를 바라며 감은 눈이지만, 습관적으로 눈꺼풀 사이가 벌어진다. 벌어진 틈으로 세상을 볼 때마다 승진은 몸을 비비 꼬며 몹시 괴로워한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승진의 귓가로 힐 자매가 작곡한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온다. 하지만 실제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렀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승진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가슴속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다. 감미로운 멜로디에 따라 승진의 감정이 이리저리 일렁인다. 그리고 마침내 촛불의 열기가 승진을 지지기 시작한다.


촛불 한 개가 승진의 발등을 지진다.

촛불 열 개가 승진의 종아리를 지진다.

촛불 스무 개가 승진의 허벅지를 지진다.

촛불 쉰 개가 승진의 등허리를 지진다.

마지막으로 촛불 백 개가 승진의 가슴팍을 지진다.


반쯤 벌어진 승진의 눈꺼풀 사이에서 얄팍한 눈물이 '주룩' 흘러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눈물의 원인은 분명하다. 수면제가 조금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를 완전히 삭제하기에 수면제 7알은 너무도 적은 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 승진의 머리에 번뜩이는 생각 한줄기가 내려앉는다. 영영 깨어나지 않는다면 앞으로 펼쳐질 모든 2월 19일은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이 아닌가? 승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은 수면제를 모두 들이키는 게 어떨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승진의 주변으로 산뜻한 공기가 쉴 새 없이 스쳐 지난다. 어느새 승진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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