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글쓰기 모임 과제로 작성한 것이다. 소설(이야기) 5단 구성에 입각하여 전체를 구성해 보고 후에 살을 붙였다. 경험했던 사실에 입각하여 썼지만 나의 기억에만 기대어 일부 내용에는 왜곡과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먼 훗날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 기억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며 썼다.
제목 : 돌려받지 못한 돈
줄거리: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쓸 때 일이다. 사례가 부족해서 1차 논문 심사에 떨어졌다. 성매매 중 젠더폭력을 다룬 주제라 인터뷰이(interviewee)를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탈 성매매를 하고 쉼터에서 교육을 받은 뒤, 비즈공예 강사로 활동하고 있던 현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그렇게 논문을 보강한 뒤 최종 심사에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이 씨에게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된다. 백육십만 원을 빌려달라는 것. 잠깐 고뇌했지만 결국 빌려줬고 약속한 날 돌려받지 못했다. 얼마 뒤, 그 사람과 연락이 끊겼고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말았다. 이제 돈을 돌려받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가끔 생각나는 그 사람과 돌려받지 못한 돈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서운했던 마음을 정리한다.
[발단] 누군가의 이야기와 시간을 사는 돈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쓸 때 일이었다. '사례가 부족하여 이대로는 통과하기 어렵겠어요. 인터뷰를 보강해 주세요.' 1차 논문 심사에서 떨어졌다. 최종심사까지는 한 달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좌절했다. 연구보다는 기획, 실행 쪽에 관심이 더 많았던 나는 길어지는 논문 집필 시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동안 모아둔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것도 한 몫했다.
통장에는 딱 이번 논문 졸업 학기 마지막 남은 두 달을 버틸 비용 밖에 없었다. 인터뷰이를 구해야 하는데 통장 잔고를 먼저 고민하는 건, 인터뷰에는 돈이 들기 때문이다. 돈으로 사람을, 사례를 산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인터뷰를 진행하면 소정의 사례를 해야 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갖춰야 할 윤리이자 기본자세다. 시간을 내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당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 거마비 수준으로 지급을 했다.
무엇보다 한 명의 인터뷰 사례를 보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깊이 들여 봐야 하는 과정으로 1차에 끝나지 않는다. 적어도 3~4차례의 만남이 이뤄진다.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인터뷰이가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린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도 시간도 없었다.
[전개] 구원투수가 되어 준 현이 씨
"그 인터뷰 제가 해 줄게요."
두어 달 전에 인터뷰를 거절했던 현이 씨였다. 현이 씨는 성매매를 그만두고 쉼터에 기거하며 탈 성매매 직업교육을 받고 있었다. 네일아트나 비즈공예가 관심이 많았다. 가늘고 검은 긴 생머리에 눈이 컸던 현이 씨는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했다. 일정 시간 교육을 받고 현장단체에 강사로 다니고 있었다.
현이 씨는 내가 봉사활동을 하던 현장단체에도 강습을 나왔다. 현이 씨는 처음에는 내가 현장 직원인 줄 알았다가, 논문을 쓰기 위해 현장 봉사활동을 다닌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거리를 두었다. 혹시라도 자기 이야기로 논문을 쓴다고 할까 봐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조용히 자기 일에 집중하는 예술가 느낌이 있었다.
그날 나는 봉사자, 현이 씨는 강사로 천호동 현장 센터에서 만났다. 먼저 인사하거나 말을 건네지 않는 현이 씨인데 그날 나라를 잃은 거 같은 내 표정에 도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동안의 사정을 얘기하자 현이 씨의 고요한 눈이 더욱 깊어졌다. 잠깐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이고 정면을 응시하더니 자기가 해 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뜻밖이라 소리는 입력이 되었지만 뜻을 해석하지 못해 눈만 깜빡였다.
"네?...... 정말요? 살았다. 감사해요 현이 씨. 저 시간 많이 안 빼앗을 거고요. 어려운 시간 내주시는 거니까 시간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할 거예요. 그리고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은 그냥 넘어가도 돼요."
다급한 마음에 속사포처럼 정식 인터뷰가 진행되었을 때 할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
현이 씨는 쉼터 생활자라 정해진 일과표가 있었고, 먼저 인터뷰에 참여한다는 것을 쉼터 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그날 집에 가서 말라죽어 가던 허브 화분에 물을 주었다. 그제야 나와 더불어 시들어가던 주변 생명체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인터뷰는 언제 시작하나요?"
인터뷰를 해 준다고 해서 고맙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잊고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그녀에게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너무 당장 내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분에 취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은 넘어가도 된다고 했지만, 이 과정 자체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힘들었던 일을 떠올려야 하니까요. 다시 한번 정식으로......"
"괜찮아요. 도움이 되고 싶고, 저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사례도 있다고 했죠?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그녀가 사례라는 말을 꺼내자, 이 인터뷰가 그녀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네 좋아요. 그럼 이번주에 바로 약속을 잡죠."
통장 잔고와 학자금 대출한도 초과상태를 떠올리며 잠깐 아찔했지만 지금은 한 발짝 내딛을 때였다. 게다가 인터뷰 사례비를 지불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사례비가 어느 정도 될까 가늠해 보았다. 회당 5만 원, 최대 4회라고 했을 때, 20만 원.. 그래. 그 정도면.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위기] 현이(가명)씨가 인터뷰를 해 준 덕분에 논문 최종심사를 통과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일백 육십만 원. 당시 넉 달 치 원룸 월세에 해당되는 돈이었다.)
[절정]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고, 돈을 빌려주지 말았어야 했나 후회가 됐다.
(돈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몇 번인가 어기고 어느 날 그 사람은 증발해 버렸다.)
[결말] 워런버핏과의 점심식사에 몇 억을 지불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에게 빌려준 돈은 어쩌면 채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