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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Jun 15. 2023

목요일 화실은 소중해

내가 되는 목요일


그림을 그립니다. 2017년 처음 시작했으니, 6년 째어요. 직장인에게는 집에 갈 힘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목요일. 한 주 중 가장 힘들다는 수요 고개를 막 넘었어요. 마음은 불금을 향해 가는 중간의 목요일, 회사와 집이 아닌 옆길로 조금 새고 싶어 시작한 그림입니다.  


night hawks, 에드워드 호퍼,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 스케치 과정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여러 가지 일들을 했어요. 상품 개발 부서에서 일하는 저는 목요일엔 생산회의에 참석합니다. 원화, 표견, 각종 테스트 완료 여부를 체크한 뒤에 제 제품을 양산하는 날짜를 지정받는 회의예요. 초도 수량도 중요해요. 제품을 출시한 뒤, 처음 3개월 동안 팔림세를 예측하여 얼마나 생산할지, '얼마나'에 해당되는 것이 초도입니다. 생소한 이 한자어들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처음 상품 개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생소했어요. 제조업계에서는 역사가 깊은 언어들인데 대부분, 제조왕국인 일본에서 쓰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제조기업의 일상에 퍼졌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오늘은 생산회의가 있는 목요일. 저는 제품 양산 일정을 배정받지 못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고요? 개선 의견을 받은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음 주에 다시 생산회의에 참석해야 해요. 내일은 다른 일이 '쳐들어' 올 것이기에, 오늘 회의에서 제기된 개선사항을 처리 부서들에 빠르게 전달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요. '되네, 안 되네,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모색하기 위한 소통을 이메일로, 전화로 하루 종일 탁구를 치듯 '핑퐁, 핑퐁' 주고받아요.


점심시간, 동료들과 어울려 회사 근처 맛집에 간 게 언제였을까요. 생산회의 앞 뒤로 한 , 두 달 정도는 무척 바쁜 시기이기 때문에 약속을 잡고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기 어려워요. 매일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대체로 그래요. 에너지가 없다고 푸념해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대화를 나누어려워 '혼밥'을 먹곤 해요. 사내식당에 혼자 내려가 먹기도 하고, 역시나 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샐러드를 받아 와, 사무실 자기 자리에서 먹기도 해요. 샐러드를 입에 앙 넣으려는 순간에 업무 전화가 오면, 포크를 내려놓고 받아요. 자기만의 휴게 규칙을 세우지 않으면, 일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고 할까요.


식사를 한 뒤에는 회의가 연달아 있었어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생산회의에 제품이 통과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는 날짜를 배정받고 상품이 무사히 출시될 거라 믿어요. 그렇다면 출시에 맞추어 준비를 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이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기록한 '정보안 작성'도 그중 하나예요. 제품의 자기소개서 같은 거예요. 이름, 나이, 학력, 경력, 특장점, 취미, 특기 같은 거 있죠. 제품의 원포인트부터 출시할 날짜, 용량, 가격, 왜 개발이 되었는지, 어떤 특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쓰면 좋을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떻게 알릴지, 구입하면 어떤 혜택을 줄지, 제품의 증명사진에 해당되는 누끼컷(누끼도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유래한 외래어입니다),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특별한 연출을 하여 찍은 말 그대로 연출컷, 광고컷, 미용법이나 사용법 짧은 영상 등 이 제품에 대한 모든 것들이 담기죠.



이 정보안을 씨앗으로 다양한 제품 홍보 콘텐츠들이 만들어져요. 기본적인 소개페이지는 물론, 상세페이지, 판매사원 교육자료, 카드뉴스, 동영상 콘텐츠 등등.  정보안을 다 작성하면, 동시다발적으로 꽃 피울 일들이죠.


다시 목요일로 돌아갈게요. 오늘은 이 정보안에 들어갈 상품의 특장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줄 전문가를 만나기로 한 날이에요. 제품을 더욱 깊게 탐색하기 위해 내용물을 개발한 연구원을 좀 탈탈 털어 볼 생각이에요. 고객 실사용 경험 및 피부측정결과 등 데이터와 제품에 어떤 기술이 적용되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연구원은 연구원의 언어로 얘기해요. 저는 그것을 열심히 공부해서 고객들에게 잘 전달해야 합니다.


[연구원 say]

"이 제품의 TEWL 측정결과 유의미한 피부장벽회복효과가 검증되었어요. 내용물을 도포한 세포모사체 실험군에서 대조군 대비 피부장벽개선효과가 00.000% 높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


[마케터 say]

지금, 새살이 돋는 듯, 매끄럽고 건강한 피부를 직접 경험해 보세요. 먼저 사용해 본 사람들이 00.000% 피부장벽개선 효과를 경험하였어요."  


대부분 이런 작업은 카피라이팅 전문가가 하는 것이 더 퀄리티가 좋아요.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상품 개발자가 그 역할을 대신할 때도 있어요. 쉽고 간결한 언어, 잘 정제된 언어이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언어가 필요해요. 자연히 글을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오늘 미팅은 2시간을 꽉 채웠습니다. 그만큼 진지하게 이 제품에 담긴 기술을 탐색하였어요. 미팅이 끝난 뒤엔 신제품 개발 외에 맡은 업무들을 처리해요. 예산 사용 계획을 업데이트하고,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있어 품의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어느새 공식 퇴근 시간인 저녁 6시가 넘었습니다. 이 시간이면 야근을 할지, 말지가 결정이 납니다. 그리고 1시간 이내로 끝낼 업무면 그대로 앉아 계속 업무를 진행하고 야근이 길어지겠다 싶을 땐, 저녁을 먹어요. 야근을 한다고 해서 일이 깔끔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일은 퇴사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드디어 이 얘기를 할 타이밍이 왔어요. 오늘은, 목요일. 화실에 가는 날이에요. 6년째 이어오는 취미죠. 유화를 그립니다. 유화는 여러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드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정이 쉬워요. 물건이 칠해진 위에 덧칠하면 새로 덧칠한 색이 그대로 얹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와 실패에 너그러워집니다. 매일 실수할까, 실패할까, 책임을 추궁당할까? 전전긍긍해 왔는데 유화의 세계에서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수정하기 쉬워서, 색을 만드는 게 재밌어서, 그리고 결과물이 확실히 내 것으로 남으니까 좋았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하고,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리며 창작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식이든 결과물이 남습니다. 이런 그림들은 홈인테리어 소품으로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빈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면, 여기가 바로 미술관, '방구석 미술관'이 됩니다. 정성껏 그려 내가 소유하며 감상하기도 하고, 소중한 지인들에게 뜻깊은 선물로 전하기도 합니다.


남는 게 있다는 좋았어요. 내 것으로. 회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도 내 것으로 남는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상품개발을 하는 저는 시스템에 제가 담당 개발자로 기록이 되지만, 현실은 내 것이라 할만한 것이 아니죠. 빈 손으로 태어나 내 것이라 할 것이 없는 것이 진리라지만, 자아가 형성된 뒤로는 '내 것'이 있나, 없나가 행불행의 큰 기준점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확실한 내 것을 갖고 싶어, 결혼을 하는 이도 보았어요.


목요일은 저에게는 사소하지만, 내 것을 실현하러 가는 날입니다. 선배들은 '일과 당신을 분리하지 마세요' '일에서 네가 쌓이도록 해',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태도야'라고 조언합니다. 마음이 부드러운 날엔 이런 말들이 주옥같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업무 스트레스로 마음이 짜게 식어, 귀가 닫히고  말아요. 당장의 조언이나 노하우 보다 따뜻한 위로 한 마디가 달아요. 확실하게 자아를 실현할 취미나 물건을 찾는 게 현실이에요.


저는 그렇게 찾은 몇 가지 '소확행(동)'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목요일엔 화실에 가는 것입니다. 한 주중 직장인이 가장 피곤한 날, 시간. 저녁 일곱 시부터 아홉 시. 캔버스에 한 주의 피로를 풀어냅니다.


night hawks(부분 확대), 에드워드 호퍼



오늘은 글이 좀 길었습니다만, 앞으로 목요일마다 화실에서 그린 그림과 한 주간의 업무 이야기를 짧게 풀어 볼 생각입니다.

일하고, 그리며 나를 찾아가는 이중생활 에세이, '내가 되는 목요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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