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대출받던 날

#단정한 100일의 반복

by 김솔솔
그 사람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 내게는 2년 동안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애슝, 서로의 옆자리가 되어주는 고양이생활, 48p)






그런 순간들이 있다. 상대방은 본업에 충실했는데 내 마음이 숙여졌던 순간들. 오늘 문장은 '고양이와 살며 빛나는 순간을 수집하는' 애슝 작가님 에세이 '불안이 감춰지는 때'에서 발췌하였다. 작가님은 전세로 이사 가며 은행에서 보증금 중 일부를 대출받아야 했다. 대출은 처음이고 금액이 얼마까지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몇 군데 은행에서 상담을 받았다. 그중에는 작가님 직업이 프리랜서인 것을 알고, 상담을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원하는 액수만큼은 나오기 어렵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은행도 있었다고. 불안 속에서 마침내 대출을 받은 곳은 은행 직원이 처음부터 된다, 안된다 결론을 통보하지 않고, 충분히 알아보고 안내해주었고, 결국은 그곳에서 대출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담당 은행 직원의 성실함에 받은 감명은 '2년 동안의 삶의 질을 결정'이라는 표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출 없이 전세 보증금을 오롯이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숙집에서 시작해서 원룸 월세, 원룸 전세, 빌라 전세, 아파트 반전세를 거쳐 겨우 자가 입성을 한 나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크게 공감이 되었다. 처음 전세 대출을 받으려고 은행을 방문했던 때, 그 떨리던 심정도. 은행 상담 직원이 마치 신처럼 느껴졌다. 신용조회를 한다고 할 때, 그게 뭐라고 심장이 그리도 뛰던지. 내 신용을 대출한도라는 금액으로 판정받는 것이 신선하고 낯설었다. 대출을 받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전정한 노예가 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대출신청서에 서명을 할 때는 마치 노비문서를 쓰는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만은 아니다. 대출은 자산 증식의 레버리지로 불리며, 사람들은 대출을 갚기 위해 일하고, 절약하고, 저축하고 어느새 자산관리 중심에 두고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 대출받았을 때는 세상 지각변동이라도 겪은 것처럼 놀랍고 떨리고 조심스럽더니, 이제는 대출과 함께 하는 삶이 자연스럽다. 대출한도로 개인 신용과 자산의 가치를 검증받는 것에도 익숙해졌고.

이제는 은행 직원의 능력, 판단과 관계없이, 대출을 갚을 능력과 금융정책에 따라 대출한도와 이자율이 정해진다는 것을 안다. 고객과 만나는 접점에서 은행 직원은 정책을 충분히 숙지하고 서류 준비를 완비할 수 있게 안내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성실함과 친절함은 고객의 시간을 절약하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준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들, 그들이 진짜 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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