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벅대는 노트북에 마음이 지치고

직장인 일기

by 김솔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힘’이야말로 결국 끝내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 정김경숙 저




다음 주에 보고해야 하는 기획안을 작성 중인데 노트북이 버벅댄다. 무슨 문제인지... 저장하기를 누르면 정식 폰트가 아니기 때문에 저장이 어렵다는 메시지가 뜨고, 슬라이드에서 슬라이드로 넘어가는 속도가 출근길 엘리베이터급으로 느리다.


4년째 사용한 노트북. 온갖 자료와 데이터를 저장하고 삭제하길 반복했다. 각종 보안패치와 실행 프로그램들이 깔리고 업데이트되길 수차례, 하드도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운 모양이다.


문득 중학생 시절 빈 카세트 테이트가 떠오른다. '공테이프'라 불렀던. 카세트 라디오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면 아무 기록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빌 공, 비어있는 테이프였다.

하나 사서 몇 번이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복사한 위에 또 복사하여 늘어난 공테이프 마냥, 처음엔 CPU도 생생하고, 메모리 공간도 충분했던 업무용 노트북도 이젠 노이즈가 깔리고 버벅대긴 일쑤.


그런데 어쩌란 말이야. 지금 달려줘야 다음 주 보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파닥거리며 지친 마음.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오늘이다. 버벅대는 노트북 키보드를 타고 들어온 과부하로 인한 열기가 내 손끝 혈관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간다. 뜨거워진 정수리에 급한 불을 끄는 심정으로 책상 위, 주물 컵을 올려본다. 치이익~! 뜨거운 것이 차가운 것을 만났을 때 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어느 정도 온도가 식자, 수명이 다한 노트북 때문에 13년 커리어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과장 화법에 헛웃음이 나온다. 결국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버벅대는 노트북을 탓하다가 커리어를 날리고 싶다는 건,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이다. 막힌 아이디어에 뚫어뻥 같은 비법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변기 뚜껑을 닫고 비법을 찾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적어도 이 상황을 객관화하여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경험한 선배들의 이야기가 잠시 멈출 용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프롤로그가 참으로 길었지만 오늘의 문장은 이런 배경에서 눈에 들어왔다. 문장 자체보다 이 글을 쓴 사람이 30년 차 직장인이며, 나이 50에 현역 직장인으로 구글 본사에서 근무에 도전하셨다는 특별 이력에 끌렸다. 한국인 은퇴 나이가 49.3세 라는데 남들 다 은퇴하여 인생이모작을 모색할 때 이 분은 구글코리아 근무 경력을 디딤돌 삼아, 본인이 낸 아이디어로 구글 본사에 취직이 되어 해외 근무를 시작했다.


30년 직장 생활에 얼마나 많은 막힘과 부침이 있었겠나. 이 책은 그 역사의 영웅담을 늘어놓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늘고 깊게 버티는 비법을 열거하는 책도 아니고. 뜻밖에 좋아하는 것을 오래 하는 비결을 체력이라고 할 만큼 체력을 갈고닦을 때 경험과 마음의 태세를 더 많이 다루었다. 그 부분이 좋았다.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순간에도 매일매일 하기로 한, 오늘의 문장 일기를 챙겼다. 내일 정도엔 업무 아이디어도 떠오를 것 같은 희망이 샘솟지는 않았지만, 정수리 온도가 정상 체온 수준으로 떨어져 탈모 걱정은 내려놓아 기쁘다.


오늘은 이기는 마음이 아니라 지는 마음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단정한 100일의 반복을 이어간다. 이길 마음 없는 나지만, 이 꾸준함만큼은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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