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어깨 같은 문장에 기대어

100일의 단정한 반복 중에서

by 김솔솔

문장들은 내가 친구들에게도 터 놓지 못할 고민들로 속앓이를 할 때, 할머니의 약손처럼 아픈 배를 어루만지듯 아프고 복잡한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살다가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툭툭, 털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무던하고 씩씩한 성격이면 좋으련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겉으론 그런척 하고 지낼지 모르지만, 여러모로 감정표현에도, 감정소화에도 서툰 인간이라 마음의 체증이 오래 가, 병이 나곤 했다.


또 이런 소심증도 있다. 혹여 내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낸다고 다른 누군가의 시간을, 감정을 착취하는 것은 아닐까. 작은 토로가남을 험담하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불평불만이 많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지는 않을끼, 따지고 재는 것도 많아진다. 뭔가를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털어내고 싶어도, 여러가지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도 미주알고주알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을 잘 털어내지 못했다.


털어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털어내지 못하고,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들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곤 했다. 한 번은 동생이 새로 산 스커트를 입고 집을 나서는 것을 보고 30년 묵은 감정이 터져버렸다. '넌 맨날 그런 식이지. 언니인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그렇게!' 동생이 벙찐 표정으로 한 말은 잊을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불편했으면 말을 하지. 아무말도 없길래 지금까지 언니가 그러라고 한 줄 알았어.'

그 때, 그 때 말하지 않고 넘어간 상황은 거기서 끝을 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질 못했다.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안에 쌓인 감정을 풀어 놓았다. 빠르게 상황이 흘러가 버린 뒤, 뒤늦게 알아차리기 시작한 내 감정과, 그것을 언어로 옮겨 적으면서 상황이 객관화되고, 조금씩 기분이 풀렸다. 욕하고 싶은 날은 욕을 썼고, 반성이 되는 날은 반성을 적었다. 후회가 밀려 올 때는 후회를, 감동이 샘 솟을 때는 감동을, 사랑이 넘쳐 흐를 때는 흘러가는 사랑을 적었다.


어떤 글은, 문장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설명해주거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을 일러주었다.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처럼. 문장은 든든한 애인의 어깨였다. 앞서 살아낸 누군가의 삶의 고뇌가 정돈되어 든든한 아우라를 풍기는 문장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공감하며 '어깨'를 내어주고 따뜻한 포옹을 선사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홀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자신 같은 사람에게 서울은 늘 자격을 묻는 듯했다.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2, 46p)

지역에서 올라 와 대학을 다니고 숨 막히는 취업준비생 시절을 보낸 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일자리를 잡아, 서울살이 20년이 가까워진다. 점점 노련하고 익숙해지는 서울생활에도 내 집 하나 없어 위태롭다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을 때, 이 문장은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게 아니구나, 위로를 건넸다.


연애가 끝나서 자꾸 눈물이 났던 작년 어느 날에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슬플 땐 많이 걸어. 그럼 길 여기저기에 슬픔을 두고 올 수 있거든.

(이슬아,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한겨레21, 1121호)


그런 원리였구나. 지난 이별엔 나도 많이 걸었다.



무겁다. 말에 묵직한 질량이 있다.

(마쓰다 미리, 딱 한 번만이라도, 소미미디어)


말이 무겁다, 입이 무겁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들은 어떤 힘이 있어서 사람을 베고, 찌르고, 살리고, 죽이고, 달나라에 보내기도 하고. 발화 현상 자체를 과학적으로 고찰해보면, 신체 언어기관인 구강, 치아, 혀 등 입안 구조물에 의해 공기를 내 보내며 터져 나오는 음파장인데, 그 음성에 질량이 있다는 생각까지는 해 보지 못했다. 대부분 의미가 미치는 영향력은 생각해 봤어도.

소설 속 상황은 자손이 없는 이모가 죽으면 그 유산이 어떻게 되는지, 혹시 유산의 처분을 밝힌 '유서'가 있는지 세무사에게 이모의 조카가 묻는 상황이이었다. 상황과 연결시켜 보았을 때 확실히 가볍고 산뜻한 분위기로 말하진 않았겠구나. 조심스럽게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듯, 조금은 끈적한 질감도 느껴지고. 짧은 문장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마음은 빗자루에 엉겨붙은 먼지덩어리였다.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어느날'중에서)


마음이 산뜻하지 않은 어느날, 이 문장을 봤을 때 작은 한숨과 함께 어깨가 처졌다.




문장들은 상담사는 아니었다. 조용히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보여주고, 울거나 웃거나 수용하거나 반문을 품거나 다양한 대화들을 시도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은 늘 날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문장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위로와 격려가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 그런 이유로 늘 가까이 두고 사랑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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