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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대표 Nov 02. 2022

나의 유년시절 그땐, 그랬지!

유년시절 에피소드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최초의 기억은?

저 사진처럼 애기 때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참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첫 기억은 유치원 때이다. 오빠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도 공부를 잘했는데 나는 선교원 포함 2-3군데를 옮겨 다녔다. 공부랑은 상관없었던 것 같고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지금도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처음 유치원이 생겼을 때 부모님께서는 나를 그 유치원에 보내셨다. 지하 솔로몬 성전이 유치원이었는데 다른 건 다 기억 안 나고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간식을 먹던 것만 기억난다. 몇 년 전 솔로몬 성전이 있던 그 자리는 공사를 해서 주차장이 되었고 내 추억의 장소는 없어졌다.


유년시절 나의 꿈은?

막연하게 사장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사장님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정말 사장님이 되었고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아쉽게도 피아노 전공자로 살고 있다. 그래도 꿈 근처 어디쯤은 와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하다.


유년시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교회에서 성탄 발표회 준비할 때 연습이 끝나면 아주 가끔 호빵을 간식으로 사주셨다. 팥호빵과 야채호빵이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팥호빵이었고 간혹 가다가 야채호빵이 있었다. 내 순서에 야채호빵이 걸리면 얌전히 받아 들긴 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 야채호빵 밑에 붙어 있던 종이에 연한 연두색 빛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호빵 나눠주시는 선생님 손만 뚫어지게 보며 기다렸다. 하얀색인지 연두색인지 눈으로 식별하면서 말이다. 피자호빵이 나오기 전 야채호빵은 그야말로 혁신이었다.


지금의 내 성격을 만든 유년시절의 경험?

성격을 만들었다고까지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성실함은 어릴 때부터 꾸준히 쌓아온 강점인 건 확실하다. 부모님께서 다니시는 교회가 멀어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오빠랑 둘이 집 근처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가 부모님 교회보다 더 멀리 이사 가면서 그때부터 부모님 교회에 함께 다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초등 저학년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버스를 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부모님, 오빠와 예배 시간이 달라서 혼자서 버스 타고 다니게 되었는데 한 번도 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고 성경학교 기간이면 새벽예배까지 다 참석했다. 깜깜한 새벽 혼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조금 무섭긴 했지만 개근에 목숨 걸고 다닌 것 같다. 출석할 때마다 스티커를 붙이고 다 모으면 선물을 받았는데 그땐 그게 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성실하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고 교육받다 보니 학교든 교회든 개근이 당연한 거였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과 성실함은 어린 시절 나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년시절 에피소드

1.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교 근처 원풍아파트에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두 발 자전거가 있었다. 우리 집에는 자전거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한테 한 번만 타보자고 부탁했고 그 친구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처음 타는데 두 발 자전거는 너무 어려웠고 그날 하루 종일 친구가 뒤에서 잡아주면서 탔다. 조금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기에 마지막으로 한 바퀴만 더 타고 간다고 하고 나는 친구에게 절대로 놓지 말라고 당부했다. 친구는 알았다고 하더니 내가 속도를 내니까 절대 뒤 돌아보지 말라고 하고는 자전거를 놓았다. 물론 나는 친구가 놓은 걸 몰랐고 한참 더 달리다가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넘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줄곧 자전거를 잘 탄다. 신기하게도 난 아빠도 엄마도 아닌 친구에게 두 발 자전거를 하루 만에 배운 것이다.


2. 3명이 할 수 있는 고무줄놀이를 친구 2명 대신 대로변 전봇대와 나무에 고무줄을 묶고 혼자서 고무줄놀이를 했다. 당시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렇게 매일 연습을 했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추측건대 부모님께서 맞벌이셨기 때문에 항상 혼자 집에 있었던 것이 하나의 원인이었을테고 엄청 열심히 해서 친구들 중 최고로 잘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갈고닦은 실력 덕분인지 나는 정말 고무줄놀이를 잘했고 편을 먹으면 친구들 모두가 나와 한편이 되고 싶어 했다.


3. 4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교회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했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통째로 다 외우는 거였다. 총 13절로 되어 있고 지금 대충 글자 수 세기로 돌려보니 560자 정도 된다. 희한하게도 누군가 나에게 강요한 것도 아닌데 악착같이 다 외워서 대회에 나갔고 여자 중 1등을 하고 메달을 목에 걸었다. 언니, 오빠들 다 제치고 메달을 딴 거라 선생님들이 참 기특해하셨다. 지금은 한절도 외우기 힘든데 그때는 무슨 용기로 그걸 다 외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때 외웠던 성경구절이 지금도 거의 기억난다는 거다. 확실히 어릴 때 머릿속에 많은걸 넣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이 든다.


4. 2살 위의 오빠랑 맨날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 구슬치기, 베개싸움, 씨름 등을 했다. 자매였다면 이런 놀이는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남매였기에 맨날 섬머슴처럼 놀았다. 오빠가 가끔 선심 쓰듯 공기놀이를 해주긴 했다.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놀 때면 날쌘돌이처럼 날아다녔고 땅따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놀이엔 만약 대회가 있었다면 거의 대표 선수급 수준이었다. 낯도 많이 가리고 말수도 거의 없고 목소리도 작았던 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노는데 진심인 아이였던 것 같다.


5.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항상 육교를 건너가야 했다. 육교에 올라가면 건너편 건물 2층이 미술학원이었다. 나는 살짝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부모님께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는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웅변학원을 보내주셨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리고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웅변학원은 그 미술학원을 지나야만 갈 수 있었고 육교를 건널 때마다 미술학원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품었다. 이게 뭔 운명의 장난인 건지... 학년이 조금 더 올라간 후 교회에서 피아노 치는 언니가 너무 부러워서 부모님께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대 반전!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는 나는 주산학원을 보내고 오빠를 피아노 학원에 등록시켰다. 그때 당시 이런 부모님의 결정에 오빠도 나도 적잖게 당황했고 왜 그 학원에 다녀야 하냐고 물었더니 배움은 다 때가 있는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 둘 다 생각지도 않았던 분야의 학원을 100% 타의에 의해 다니면서 열심히 할리가 없었고 나는 수시로 오빠네 피아노 학원에 드나들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엔 같은 건물이었던 것 같다. 피아노 치기 싫어하는 오빠 대신 연습실 안에서 내가 대신 쳐준 적도 종종 있었다. 피아노를 엄청 좋아했던 나는 훗날 결국 피아노 전공을 했다. 만약 그때 오빠 대신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셨다면 지금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어있지 않을까?'라고 내 멋대로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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