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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대표 Dec 18. 2024

<프롤로그>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나는 왜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연주의 마지막 음이 울렸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이 천천히 멈추며, 무대 위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적막 속에서, 한순간 무언가 깨닫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터져 나온 박수 소리.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아린은 손가락 끝에 남은 울림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대 아래는 환한 미소를 띤 얼굴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쳤다.


“브라보!” “다시 한 곡 부탁합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칼이 조명 아래에서 가볍게 흩날렸다.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따뜻한 감각으로 가득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지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단원들과 짧게 눈을 마주친 후, 서로에게 감사를 전하듯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그 순간의 찬란함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이들이 만드는 하나의 하모니는 그녀가 언제나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순간은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스포트라이트도, 박수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식어버린 커피 한 잔이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커피잔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손끝을 스치는 싸늘한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거실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위로라기보다는 무언가 무겁게 내려앉은 듯한 정적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상자들과 쌓여 있는 물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때 그녀를 살게 했던 것들이었다.

밤새워 고민하며 하나하나 고르고, 포장하고, 고객들에게 전달했던 그 물건들. 그녀는 그 작은 물건들이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사랑과 감성을 담았던 그 순간들이 지금은 그녀를 비난하듯, 거실 한가운데 흩어져 있었다.

반쯤 찢어진 비닐 포장, 손도 대지 않은 상품들. "이건 당신을 위한 특별한 물건이에요"라고 속삭이던 그것들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조용히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더 이상 그녀의 소중한 자산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선물도 아니었다. 그저 "팔리지 않은 실패의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탁자 위의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폐업 신청 마감 : 3일 전.’


굵은 글씨로 표시된 숫자가 달력의 여백 위에서 서늘하게 번쩍였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포기해. 네가 해낸 건 없어."


그녀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쌓여 있는 상자들이 마치 하나하나 무게를 더하는 듯했다. 포장지의 반짝이는 금박 장식조차도 지금은 날카로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거실에 흩어진 물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이 아니었다. 그녀가 얼마나 그들을 소중히 다뤘든 간에, 지금의 그들은 그저 무언가가 끝났음을 증명하는 흔적일 뿐이었다.


"쓸모없어."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탁자 위의 커피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컵 안에 남아 있는 차갑고도 쓰디쓴 커피를 조심스레 입에 가져갔다.

이미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의 쓴맛이 혀끝에 퍼지며 목구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 맛은 그녀의 내면을 잠식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사람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로 반짝이는 거리의 간판들, 따뜻해 보이는 음료를 들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목적지가 있었다.

하지만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축 처진 어깨, 텅 빈 눈빛, 둥근 얼굴선. 한때 모든 것을 쥐고 있다고 믿었던 손은 지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함만을 쥐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등지고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래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무대 위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고,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연주하던 순간. 사진 속 그녀는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두 눈은 결단력으로 빛났고, 손끝은 세상 모든 것을 통제하는 듯 안정적이었다.

그녀는 사진 속의 손을 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은 것은 따뜻한 건반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먼지뿐이었다.

먼지가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흩어지자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손끝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대답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방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멈춰 세웠다.


"엄마, 시간 됐어요!"


막내딸 보미가 방문 틈새로 얼굴을 내밀며 방긋 웃고 있었다.


"오늘 아빠가 다 같이 외식하자고 했는데, 엄마도 가는 거죠?"


그 환한 미소는 방 안을 가득 채운 차가운 공기를 잠시나마 녹이는 듯했다.

아린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금방 나갈게."


보미는 만족한 얼굴로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방 안에 가볍게 울리며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딸이 떠난 자리에는 다시 고요함만이 내려앉았다.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손에 들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컵 안에는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한 모금을 조용히 마셨다.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싱크대로 걸어갔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리고 무거웠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도시의 겨울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리의 불빛은 반짝였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군가는 커다란 머플러를 두르고,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종종 걷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분명 목적지가 있었다. 하지만 유리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방향을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커피잔을 천천히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끝은 차가웠고,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 끝일까?”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이 더 깊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남편 서준의 이름이 떴다.


"어디야? 곧 나올 거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이 오히려 그녀를 찌르는 듯했다.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응, 나갈게."


전화를 끊은 뒤 커피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목소리는 작고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작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닦으며, 자신도 모르게 사진 속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건반 위에 올려졌던 손. 한때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순간. 그때 그녀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따스한 감각이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녀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녀의 귓가에는 여전히 도시의 소음과 겨울바람의 속삭임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의 발끝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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