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dshoes May 19. 2023

마쓰모토 세이초와 열차의 용의자들

추리소설 리뷰 : <점과 선>(1958)

오래 전 쓴, 이글루스 백업 글 중 하나. 여행기는 아닌데 ‘추리소설+여행’ 매거진을 새로 만들었으니 그냥 넣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옮겨왔다. (제목은 훼이크 아닌 훼이크 - 소설에 기차여행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한다!). 지금은 조금 소강상태지만, 추리소설읽기는 여행 다음으로 나의 최애 취미.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1958). 이 작가를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사회파'라는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 않나 싶다. 일간지 1면에 실렸던 실화 같은게 배경이 되고 죄가 밉지 사람이 밉나 류의 동기가 꼭 담겨 있어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인데, 이 소설에 사실 그런 것은 없었다. 아니 '현실파'라고 하는게 더 맞는 게 아닐까? 사회파라는 이름은 결국 에도가와 란포-요코미조 세이시 계열과 다른 스타일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는 거 같다. 그러니까 엽기적 전설 같은 걸 써서 '불가능의 아우라'를 두르는 작위적 세팅을 만들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과 동기, 추리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이 계열의 후계자로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를 꼽는 걸로 봐서 내 생각이 맞았다. 그렇다면 사회파의 반대편인 신본격도 사실 맞는 이름은 아니다. <점과 선>도 순수한 추리적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신본격이 지향하는 것과 다를 바가없었기 때문이다(시마다 소지의 <용와정 살인사건>의 경우 사회파와는 거리가 멀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엽기 사건들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사회파적이 아닌가). 결국 사회파니 신본격이니 하는 구별은 괜스레 선입견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잠정적 결론을 얻었다.


나로 말하면 '불가능의 아우라'과에 무조건 끌리는 독자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사회파라면 사회파를 꺼려할 이유도 없는 거다. 결정적으로 이 <점과 선>을 읽고 더 그렇게 됐다. 그 어디에도 불가능의 아우라 따위는 없고 지극히 드라이하고 상식적이고 꼼꼼한데, 놀랍게도 그 모든 엽기적 설정들을 다 합친 것보다 이 소설은 더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었다! 신본격 계열의 범인들이 갖고 있던 장인정신을 여기서는형사들이 갖고 있었다. 괴짜 천재는 커녕 길 가다가 몇 번씩은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형사들이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집요하고 견실한 수사로 모든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단 하나의 자극적인 장면도 주관적인 감상도 없고 상식을 뛰어넘는 트릭의 쾌감 따위도 없지만, 내가 바로 옆에서 형사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고 있는 듯한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진다.


이토록 독자와 동일선상에서 함께 사건을 꼼꼼히 짚어나가는 추리소설은 정말 오랜만이다. 괴짜 천재 탐정이라면 단번에 비약할 지점에서 심하게 오래 머문다 싶을 정도로 하나의 의혹을 앞에 놓고 끊임없이 곱씹으며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애쓴다. 트릭, 동기, 추리, 그 모든 것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가고 설득력이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단순함의 승리다.


- 사건 관련 장소가 후쿠오카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 있는 데다 기차여행의 시간차 트릭을 깨는 추리과정이 등장한다. 내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또 어떻게 알고... 기차의 궤적을 좇을 때 등장하는 여러 지명들, 곳곳으로 떠나는 서로 다른 종류의 기차 시간표, 이런 것에 내가 또 사족을 못쓴다. 유난히 철도여행에 얽힌 사건을 많이 다룬 크리스티 여사를 내가 좋아하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는않은 듯.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도 비슷한 트릭이 나와서 즐거웠는데, 한 가지재밌는 건 확실히 신칸센 시대와 그 이전 시대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는 거. 요코미조 세이시의 <나비부인 살인사건>도 도쿄-오사카 가는데 진짜 오래 걸리더니, <점과 선>은 한술 더 뜬다. 한번 탔다 하면 기본이 15시간, 20시간의 여행인데 이거야 중국대륙 횡단하는 기분. 그래도 이 정도는 타야 기차 탔다고 할 수 있..


- 추리소설을 볼 때 발표연도를 먼저 확인하게 된다.트릭이나 추리의 퀄리티를 평가하기 전에 시대를 감안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점과 선>의 발표시기는 읽은 후에 확인했지만, 확실히 읽으면서도세월이 느껴지긴 했다. 얼마 전에 다시 읽은 <엘러리 퀸의 모험>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더라. 지금 보면 이용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현대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많은 고전적 트릭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결국 오늘날 추리작가가 나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테크놀로지 이용법 자체를 재료로 사용하거나, 테크놀로지와 인위적으로 단절된 상황을 만드는 것. 둘 다 어렵겠지만 후자는 더 어렵다. 현실성을 희생하자니세팅이 작위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쿄고쿠 나츠히코가 195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택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매우 영리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대한 향수를 신본격 작가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가지고 있는 나같은 독자에겐 어찌 보면 이건 촘 슬픈 일..ㅠㅠ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는 길이 결국 장수할 수 있는 길임은 분명한데도 나 역시 여전히 눈 덮인 산장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사건 따위에 어쩔 수 없는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이다.


- 홈즈와 포와로 아저씨, 마플 할머니의 열혈 팬이었고, 엘러리 퀸, 반 다인과 딕슨 카 까지가 '나의' 추리작가였다. 그 이후 하드보일드류의 소설에는 흥미를붙이지 못해서 에드 맥베인 정도만 괜찮다 싶었을 뿐 오랫동안 추리소설을 보지 않았다. 번역된 것도 없었고... 그러다 어느 날 쿄고쿠 나츠히코와 아야츠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만나게 됐을 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이라니. 황금기의 추리소설에 대한그들의 애정, 그것만으로도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더 이상 클로즈드 서클 같은 세팅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다. 쓰다 보니 어쩌면 내가 아야츠지 유키토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내는 것도 이 세팅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카무라 세이지 월드'에 대한 나의 애정 역시, 불가능한 사건이 벌어지는 불가능한 공간에 대한 향수, 거기서 나온 것인지도.


- 추가 : 일본 추리소설을 읽을 때 한 가지 거슬리는 건, 확연히 드러나는 남녀차별적 상황. 마쓰모토 세이초의 경우 시대가 옛날이라 이런게 더 많이 드러난다. 형사와 형사 아내의 관계가 마치 주인과 하녀 관계 같다. 당시의 보편적인 상황이었을까 유난히 이 사람이 이런 설정이 심한 것일까? 어쨌든 이 부분은 접고 봐야 한다. 하기야 동시대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경우도 남성 판타지가 좀 많이 들어가 있긴 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