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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몽은 과학입니다. 구남친은 버려야 합니다.

저딴 놈이랑 만난 내 청춘이 아깝고 불쌍해서 렌즈를 낀 채로 엉엉 울었다

by 프니

구남친에게 연락이 올 경우의 수를 구하느라 날밤을 까던 어느 날, 정말 신기하게도 그에게 연락이 왔다. 심지어는 만나잔다. 역시 네놈도 결국은 나를 잊지 못했구나. 네가 비록 나를 두 번이나 찼지만,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면서 만나 달라고 하면, 일주일 정도 생각해 본다고 말한 뒤, 3일째 되는 저녁 즈음에 “음, 생각해보니, 한번 더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라고 말을 해주어야지.라는 생각으로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아, 예지몽이란 것은 정말 과학인 것인가. 나는 그를 만나기 전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가 아이를 가졌다며, 부풀어진 배를 들이민 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런 미친. 욕이 나오는 꿈을 꾼 덕분에 찝찝해진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그는 내게 삼겹살을 사주었다.


밥상 위에 올려진 그의 핸드폰 케이스에는 캐릭터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 여자 친구가 붙여준 거구나. 직감이 왔다. 어쩌면, 오늘 꾼 꿈이 정말 복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순간 허튼 마음을 먹고 온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불판처럼 뜨거워졌다. 빨리 삼겹살이나 주워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하고 일어서는 내게 그는 공원에 가자며 나를 붙잡았다.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적 드문 공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으로 날 끌고 간 그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조용히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흡사 불법 밀거래를 하는 사람들처럼 그는 조심스러워 보였다.


"이게 뭐야?"

"나 애기가 생겼어."

"어..?"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초음파 사진이었다. 태어나서 누군가의 초음파 사진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게 구남친 아이의 초음파라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머릿속은 공사장의 포클레인과 굴삭기의 소리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애가 생겼다.. 애가 생겼더라. 사실 구남친이 된 놈이 애가 생겼다는 말은 내게 큰 일은 아니었지만, 적중률 100%가 되어버린 나의 꿈이 떠올라서 나는 뒷걸음질 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꼭 만나서 할 말이 있다던 말이 자기가 아이를 가져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니. 진짜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결혼식은 바로 다음 달이었다. 하하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나와 헤어지고 세 달도 되지 않아 결혼을 한다는 말이었다. 지금에서야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결혼을 하든 말든 알아서 하지 왜 나한테 난리야>라는 말이 튀어나오지만, 그때는 바보같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네가 아이가 생겼구나. 게다가 결혼식은 다음 달이구나. 그렇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나는 불쑥 눈물이 터졌다. 그가 그리워서도 아니고, 불과 세 달 전만 해도 내게 사랑을 말하던 그가 애아빠가 돼서도 아니고, 그가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서도 아니라 저딴 놈이랑 만난 내 청춘이 아깝고 불쌍해서 렌즈를 낀 채로 엉엉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의 프로필 사진은 웨딩사진으로 바뀌었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마지막까지 미안하다고 엉엉 울면서 본인이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겠다는 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제대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별은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이 정도 되면, 애초부터 만나지 않았어야 할 인연이 아닌가. 한때는 운명의 짝이라고 생각하며 고백했던 시간들이 허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와 결혼을 하지 않게 되어서, 일말의 미련조차 남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얼마 뒤, 또 한 번 그가 꿈에 나왔다. 그와 나는 결혼을 한 모양이었다. 출근 전 아침밥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그가 내게 소리쳤다.

"야, 너 내가 전기밥솥 사지 말라고 했잖아. 압력밥솥이 전기세도 안 나오고 좋다고 했지?"

"아 미안, 이게 편해서."

"네가 전기세 낼 거야? 당장 팔아버려."

"응, 미안."

그가 항상 내게 했던 말들이었다. 돈을 많이 모으고 싶다는 본인의 인생계획을 말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결혼을 하면 전기밥솥 대신 압력밥솥을 쓰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당시에는 눈에 콩깍지가 오조오억 개 끼어있어서 현대인의 유모어쯤으로 생각하고 넘겼었지만 항상 그는 진심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부리나케 부엌으로 향했다. 정수기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전기밥솥을 보고 안도감에 쿵쿵대던 심장이 슬슬 차분해졌다. 그리고 혼자 되내었다.

"아 헤어져서 졸라 다행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구남친이 내게 전화를 해서 보고 싶다고 말할 경우의 수를 세는 무의미한 짓을 그만두었다. 임신한 배를 들이밀면서 허허 웃는 얼굴도, 압력밥솥에 밥을 하라며 성질을 내는 껄끄러운 목소리도 더 이상 내 꿈에 출연하지 않는다. 이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그를 꿈에서조차 보지 못하는 이 아름다운 꿈과 현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환희의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미련을 떨쳐 낼 실용적인 팁

헤어진 뒤, 나는 주기적으로 글을 썼다. 글이라기보다는 낙서였지만, 그것은 이별의 아픔에 허우적대는 나를 구해 준 생명의 밧줄이었다.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흰 종이 한 장을 준비한다.

2.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는다.

3. 왼쪽에는 "그 사람과 만나는 동안 상처 받았던 것"들을 모두 적는다.

(상처 받은 행동, 말, 문자 모든 것이든 좋다.)

4. 오른쪽에는 "그 사람과 계속 만났다면 일어났을 일" 들을 적는다.


왼쪽에는 이런 것들을 적었다.

1. 길을 지나가는 여자를 보더니, "너도 저 여자처럼 좀 꾸미고 다녀봐"라고 함.

2. 이마에 난 뾰루지를 보더니, "좀 씻고 다녀라, 같이 다니기 창피해"라고 함.

3. 회식 끝나고 집에 간다고 하더니, 여자와 모텔에 간 뒤 찜질방에서 잤다고 거짓말을 함.

4. 불법 유흥업소에 다녀온 것을 걸리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함.

(회사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 거야, 그것도 이해 못해줘?") 등등


오른쪽에는 "이 남자와 계속 만났다면, 이 남자와 결혼을 했다면"이라고 적고 시작했다.


1. 집에서 오래된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너도 좀, 젊은 여자처럼 꾸미고 살아라. 그게 뭐냐?"

2. 아이를 낳고 살이 찐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 좀 빼라, 뱃살이 부끄럽지도 않냐? 난 너랑 같이 다니는 거 너무 창피해."

3. 회식 끝나고 바로 집으로 온다더니, 외간 여자와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됨.

4. 불법 유흥업소에 다녀왔으면서도 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 여자가 뭘 안다고 그래? 네가 사회생활을 알아?"


하얀 종이 위에 구남자 친구의 행적들을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행위는, 그리움과 미련이라는 안개에 가려져있던 객관적인 진. 실. 그리고 팩. 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종이 한 장에 고스란히 적힌 과거의 상처와, 상처로 얼룩 질 미래를 동시에 마주하게 되면, "내가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힘들어했었던 거야?"라는 자조적인 반성까지 하게 만든다. "아 진짜, 망할 뻔했네. 나 정말 뭐에 홀린 거 아냐?"로 시작한 반성은, "저딴 새끼랑 다시 안 만난 걸 다행이다, 재회 같은 거 안 한 게 천만다행이야. 하느님, 부처님, 천지 신령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간증이 술술 새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종이위에 써내려간 흔적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 그러니까 예지몽은 과학이고, 낙서는 팩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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