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고 싶어 질수록 외로워진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깨고

by 권화린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젖은 옷을 입고 퇴근길 만원 버스를 올라탄 기분을 안다. 내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을 적시고, 축축하고 무거운 섬유가 살결에 달라붙어 소름이 돋는 불쾌함.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저 내 옷이 자기 몸에 스칠까 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사릴뿐이다. 그때 밀려오는 서러움은 물리적인 추위보다 매섭다. '저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추운지, 이 옷이 얼마나 무거운지 전혀 모르는구나.'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비'에 젖은 채 살아간다. 누군가는 상사에게 들은 비수 같은 말에, 누군가는 자식의 서툰 반항에, 또 누군가는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상실감에 젖어 있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누군가 다가와 따뜻한 수건을 건네며 "정말 춥겠구나, 얼마나 무거웠니"라고 물어봐 주기를. 하지만 타인이 건네는 위로는 대개 "비가 많이 오네, 조심하지 그랬어"라는 건조한 관찰에 그친다. 이해받고 싶은 욕구와 현실의 괴리, 그 틈새에서 외로움은 곰팡이처럼 피어오른다.




이해라는 이름의 인질극, 그리고 사내정치

직장은 '이해'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가장 처참하게 부서지는 전쟁터였다. 동료들에게 나의 수고로움을 알아주길 바랐고, 상사가 나의 능력을 진심으로 알아주길 기대하며 내 마음의 패를 너무 쉽게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깨달았다. 직장이라는 생태계에서 타인의 성취는 곧 나의 위협으로 치환된다는 것을. 내가 밤을 새워 만든 기획안이 박수를 받을 때, 옆자리 동료가 느끼는 감정은 경탄보다는 결핍에 가깝다.


나의 노력을 이해받고 싶어 슬쩍 내비친 속마음은 사내정치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건넨 약점은 나를 공격할 빌미가 되었고, 나의 열정은 '잘난 척'이나 '정치질'이라는 프레임에 갇혔다. 질투는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이 이해받고 인정받는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타인에게 나를 알아달라고 매달릴수록 조직 내의 시선은 날카로워졌고, 역설적으로 나는 더 철저히 고립되었다. 타인의 마음에 나를 좋게 기록하려는 노력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마음의 번역기가 일으키는 치명적인 오류

우리는 가까운 사이라면 당연히 내 마음을 '번역' 없이도 알아야 한다고 믿는 오만을 부릴 때가 있다. "말 안 해도 알지?"라는 말은 관계를 망치는 독약이었다.


온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돌아온 저녁, 아이가 무심코 던진 "오늘 국 왜 이렇게 짜?"라는 한마디에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느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진짜 원한 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한마디였다. 누적된 피로를 안고 부랴부랴 저녁을 준비했건만 그 노고를 알아주지 않은 아들에게 내심 서운했었다. 엄마가 밖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들어와서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이니까 그저 감사의 표현 한마디 말해주는 것이 나에겐 '완벽한 이해'였다.


하지만 타인의 뇌에는 내 마음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모니터가 없다. 내 마음의 백 장 짜리 보고서를 상대가 단 한 줄의 요약본으로 읽어주길 바랐지만, 상대는 제목조차 읽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나를 설명하려 애쓸수록, 그리고 상대가 그 설명의 행간을 놓칠수록 고립감은 깊어졌다. 외국인에게 서툰 몸짓으로 길을 묻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설 때의 그 막막한 단절감과 같았다.




이해받지 못할 권리를 선언하며 얻은 생존법

치열한 관계의 소용돌이 끝에 내가 찾아낸 생존법은 '이해받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타인의 인정에 목매는 순간, 내 행복의 스위치는 타인의 손가락에 달리게 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거나 질투할 때, 구태여 해명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기로 했다. "당신은 나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나의 진실을 압니다"라는 태도가 사내정치라는 거친 파도를 넘게 하는 유일한 구명보트였다.


외로움은 자동차 계기판에 들어온 '연료부족' 경고등과 같다. 기름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주유소를 찾지, 경고등 자체가 고장 났다며 계기판을 두들기지 않는다. 이해받고 싶어 외롭다는 건 타인에게 에너지를 구걸하라는 뜻이 아니라, 나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였다. 타인이 건네는 위로가 설탕물처럼 일시적인 당분을 준다면, 내가 나에게 건네는 이해는 나를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된다. 타인의 공감이 없어도 내 슬픔은 충분히 슬픈 것이고, 내 수고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다.



고독이라는 요새에서 발견한 빛

이해받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금 더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공간을 '나만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숨을 고르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곁을 지킬 '나'뿐이라는 진실이다.


당신의 고독 속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해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섬에서 등대를 비추다 우연히 불빛이 맞닿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날에도 나는 여전히 소중하다.


오늘 밤, 이해받고 싶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다면 스스로에게 이 말을 건네본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다 알아. 그걸로 충분해."타인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느라 낭비했던 시선을 거두고 내면을 응시할 때, 나는 비로소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곳에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가장 따뜻한 이해자가 이미 살고 있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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