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고 불리기까지
아기는 아직도 아기고 나는 아직도 '엄'이다
아기가 태어난 지 만으로 6개월이 지났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나는 100일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다들 '백일의 기적이 나타날 거야', '백일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야' 하는 말들로 날 위로했기 때문에 마치 나는 백일만 지나면 아기가 알아서 먹고, 씻고, 자고, 말하고, 달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7개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아기와 여전히 허둥지둥 아기의 수발을 들고 있는 스스로를 보고 있자니 나의 지난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깨닫게 된다. 인간의 성장은 생각보다 엄청 느렸다. 아기도 나도.
내 생각대로였다면 이제 막 200일을 넘긴 나의 아기는 어엿한 사람이 되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배밀이를 하다가 앉으려는 시도를 하고, 나와 남편이 본인의 믿을구석임을 짐작하는 듯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형언하기 힘든 음절로 옹알이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배가 고파도, 졸려도, 심심해도, 아파도 이 아기가 할 수 있는 건 울음과 보챔뿐이다. 나는 각각의 울음과 보챔 사이 미묘한 간극을 파악하여 최대한 빠르게 대응해야 한다. 7개월을 해 왔으면서 아직도 정답률은 70프로 정도다. 그래도 먹이기, 기저귀, 놀아주기, 재우기의 물레를 매번 한 바퀴씩 돌던 과거보단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고 위안해본다.
초점도 없이 인형처럼 누워만 있던 아기가 기고, 눈 맞춤하고, 옹알거리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많이 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의 성장이 더디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직 제대로 된 '엄마'소리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소리는 금방 하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기대는 어느새 내가 엄마라는 소리를 들을 자격이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당연히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아기를 잉태한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며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곤 했다. 이미 나는 우리가 흔히들 일컫는 엄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진짜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야 나는 엄마가 아니라 그저 '아기를 낳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후 두 달까지는 모성애라기보다는 책임감으로 아이를 돌봤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너무 그리웠고, 망가진 나의 몸을 돌보기도 벅찼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이 아기에 대한 책임감이 날 움직이게 했고, 이 아기에게 적시에 도움을 주자면 아기를 깊이 관찰해야 했다. 둘이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당연히 정이 들게 되었고 이제는 아기가 무엇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어도 힘듦보다는 예쁨이 크다. 내가 힘들더라도 아기가 좋아한다면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고 싶다. 가끔 이것이 모성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점점 진짜 엄마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라고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나 같은 초보 엄마에게 시간을 주는 것 같다. 내가 어엿한 엄마가 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 같다. 대부분의 초보 엄마가 그러하듯 나 역시 막연히 이제 아기를 낳아서 기를 것이라는 각오만 있었다. 그 아기는 어떤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능력치가 개발되는지, 엄마인 내가 제 때에 어떤 대응을 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가 전혀 없었다. 이제야 아이가 잠드는 사이 근근이 유튜브의 똑 부러진 엄마들을 보며 공부하는 이유다.
나의 아기는 이제 막 '엄~', '음~', '엄ㅁ' 정도의 발음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엄마'까진 아니어도 '엄'정도의 자세가 나오는 게 아닐까 자부심을 가져본다. 7개월간 폭풍같이 성장했으나 여전히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는 나의 아기와 그런 아기를 7개월이나 돌봤으면서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는 오늘도 함께 천천히 성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