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종훈 Sep 09. 2023

바람의 계보(系譜)

어느 순간부터 빛바랜 족보(族譜) 펼쳐 보지 않는다. 공허(空虛)한 바람의 출전(出典)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한낱 허언(虛言)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래전 이렇다 할 화해(和解) 한 번 못하고 흩어져 바람으로 돌아간 아버지. 당신 안에 일던 바람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두려운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내 안에도 가끔 나도 모르는 바람이 일어서이다.


그간 애써 외면하며 안간힘 다해 봉인(封印)해둔 그 바람.   


당신께서

낡은 흑백 사진 속 한 장면처럼

오래전 한 봄날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먼산바라기 하고 계시던 그때

그런 당신을 어머니께서는

우물가 앉아 빨래하시다가도

마당 한쪽 묻어둔 장독에서

곰삭은 김치 꺼내시면서도

못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쳐다보셨다는데요.

아니 어쩌면, 당신이 아니라

댓돌 위 가지런히 놓인 당신의 흰 고무신

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는데요.

당신의 이전, 그리고 그 이전

봄날의 이력(履歷)처럼

그렇듯 넋 놓고 보고 계시다가는

또 말없이 훌쩍 어딘가로 떠나

봄, 여름 다 가고 가을 이슥한 무렵

닳고 때 묻은 고무신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리하여, 그 봄날 당신께서는

다시 바람의 향방(向方)

가늠하고 계셨던 것인가요?

아니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봄날

없던 바람을 당신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기어이 잣아 올려

허공(虛空)에 흩어놓고 계셨던가요?

요양병원 당신의 침대 아래 놓인 신발

더 이상 닳을 일도 때 묻을 일도 없던 때

그리하여 설령, 당신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폭풍이 일 것이라도 더 이상 유목(遊牧)의 삶

사실 수 없었던 그때, 내 벼르기만 했을 뿐

내내 감춰두었던 날 선 검(劍) 비로소 뽑아

당신에게 겨누었지요.

계셨으되 아니 계신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신,

이름뿐인 아버지께서

자식 대신 키우신 것이 무엇이었냐는

내 독(毒)한 물음에 대답 대신

내 손 가만히 잡고 쓰다듬으며

쳐다보시던 당신의 눈에 순간 일었다가

흩어지던, 허무(虛無) 같기도

회한(悔恨) 같기도 한 그 무엇.

잡혀 있던 손이 아니라

당신의 눈에서 내 눈으로 휘몰아쳐

단숨에 읽히던,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결코 길들일 수도, 가두어둘 수도 없는

바람과의 통정(通情), 혹은 유전(遺傳) 같은 것.


바람이 분다. 바람의 출처(出處)이던 당신을

바람에 의탁(依託)해 흩뿌린 이후

더 이상 불지 않으리라 여겼던 바람이

환한 봄날, 너무 눈부시게 피어

까닭 없이 서러운 산벚나무 스쳐지나

인적 드문 깊은 산 암자 마루에

오래전 그때의 당신처럼 앉아있는

내게로 불어온다. 당신이신가?

신발 끈 고쳐 매고 일어서자

난분분(亂紛紛), 흩날리는 꽃잎들.



이전 04화 백년 서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