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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09. 2023

바람의 계보(系譜)

어느 순간부터 빛바랜 족보(族譜) 펼쳐 보지 않는다. 공허(空虛)한 바람의 출전(出典)이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한낱 허언(虛言)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래전 이렇다 할 화해(和解) 한 번 못하고 흩어져 바람으로 돌아간 아버지. 당신 안에 일던 바람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인지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두려운 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내 안에도 가끔 나도 모르는 바람이 일어서이다.


그간 애써 외면하며 안간힘 다해 봉인(封印)해둔 그 바람.   


당신께서

낡은 흑백 사진 속 한 장면처럼

오래전 한 봄날

툇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먼산바라기 하고 계시던 그때

그런 당신을 어머니께서는

우물가 앉아 빨래하시다가도

마당 한쪽 묻어둔 장독에서

곰삭은 김치 꺼내시면서도

못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쳐다보셨다는데요.

아니 어쩌면, 당신이 아니라

댓돌 위 가지런히 놓인 당신의 흰 고무신

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는데요.

당신의 이전, 그리고 그 이전

봄날의 이력(履歷)처럼

그렇듯 넋 놓고 보고 계시다가는

또 말없이 훌쩍 어딘가로 떠나

봄, 여름 다 가고 가을 이슥한 무렵

닳고 때 묻은 고무신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리하여, 그 봄날 당신께서는

다시 바람의 향방(向方)

가늠하고 계셨던 것인가요?

아니면,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봄날

없던 바람을 당신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기어이 잣아 올려

허공(虛空)에 흩어놓고 계셨던가요?

요양병원 당신의 침대 아래 놓인 신발

더 이상 닳을 일도 때 묻을 일도 없던 때

그리하여 설령, 당신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폭풍이 일 것이라도 더 이상 유목(遊牧)의 삶

사실 수 없었던 그때, 내 벼르기만 했을 뿐

내내 감춰두었던 날 선 검(劍) 비로소 뽑아

당신에게 겨누었지요.

계셨으되 아니 계신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신,

이름뿐인 아버지께서

자식 대신 키우신 것이 무엇이었냐는

내 독(毒)한 물음에 대답 대신

내 손 가만히 잡고 쓰다듬으며

쳐다보시던 당신의 눈에 순간 일었다가

흩어지던, 허무(虛無) 같기도

회한(悔恨) 같기도 한 그 무엇.

잡혀 있던 손이 아니라

당신의 눈에서 내 눈으로 휘몰아쳐

단숨에 읽히던,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결코 길들일 수도, 가두어둘 수도 없는

바람과의 통정(通情), 혹은 유전(遺傳) 같은 것.


바람이 분다. 바람의 출처(出處)이던 당신을

바람에 의탁(依託)해 흩뿌린 이후

더 이상 불지 않으리라 여겼던 바람이

환한 봄날, 너무 눈부시게 피어

까닭 없이 서러운 산벚나무 스쳐지나

인적 드문 깊은 산 암자 마루에

오래전 그때의 당신처럼 앉아있는

내게로 불어온다. 당신이신가?

신발 끈 고쳐 매고 일어서자

난분분(亂紛紛), 흩날리는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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