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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18. 2023

백년 서점

몇 년 전 일본 여행 중 점심 먹기 위해 들렀던 우동 가게비록 건물은 허름했지만 가게 역사가 150가게 안 모든 것이 오래되어 마치 시간 거슬러 어느 한 곳에 앉아있는 것만 같던 그곳을 한낱 노포(老鋪)라고만 할 수 없던 것은 4대째 변함없이 그 맛 이어온 한 그릇의 우동에 담긴 자부심과 내공 때문일 것그날벽면마다에 빼꼭하게 적혀 있던 방문객들, 옛사람들과 당대 사람들의 낙서 아닌 낙서에 굳이 내 흔적 더했던 것은 다시 150년 후 어느 날 이곳 찾은 누군가가 타국(他國)의 일인(一人)도 이곳에 와 맛난 우동 한 그릇 잘 먹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과 함께 오래 그 명맥(命脈이어온그리고 이어갈 가게와 그 주인들에게 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여 타지(他地)에서 보내다 집으로 돌아와 은행 갈 일 있어 상가 골목 걸어가다 한 곳에서 걸음 멈추고 오래 살아 익숙한 장소였음에도 마치 낯선 곳처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그곳이 맞는데 거기에 있어야 할 서점(書店)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십여 년 전 지금 이곳으로 이사해 왔을 때도, 그리고 그 이전부터 늘 그 자리에 있어 사십여 년 가까이 되었다는 오래된 서점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휴대폰 매장이 들어서 있었다. 

 

타지로 떠나기 며칠 전 그곳 지나다 다량(多量)의 책들 매장 밖으로 들어내 끈으로 묶던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매장 정리 차원으로만 여겼지 폐점(閉店) 위한 작업이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날 쉬이 걸음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그 앞 서성거렸던 것은 까닭 모를 허전함이 들어서였다. 느티나무 할배, 오래전 살았던 고향 동네 초입(初入)에 늠름하게 서서 천둥벌거숭이였던 동네 조무래기들이 그 위 버릇없이 오르내려도 꾸중은커녕 허허하며 인자한 웃음 짓는 것만 같던 그 나무가 어느 날 한순간 베어지고 그루터기만 겨우 남은 것 볼 때마다 느꼈던 공허(空虛)와 상실(喪失)의 느낌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행복한 선택(選擇)의 시간,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읽고 싶은 책 골라 마우스 몇 번 딸깍이거나 휴대폰 버튼 누르면 집까지 배달해 주는 편리한 온라인(on-line)에 매몰된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오프라인(off-line)으로 전향(轉向)한 것은 무수히 많은 책들 가지런히 꽂혀있는 서가(書架) 눈으로 훑어가다 마침내 한 권의 책 골랐을 때의 짜릿함과 뿌듯함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서점은, 그리고 그곳 층층의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그 많은 책은 어디로 간 것일까? 


서점 없어진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친에게서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업(業) 이어받아 오십 대 초반까지 서점을 운영한 사람 좋던 주인과 변변한 작별 인사 한 번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섭섭했다. 아무리 책을 오래 골라도 눈치 한 번 주지 않아 행복한 시간이 참으로 편안했던 그의 그 인내에 고마움이라도 표하는 것이 그에 합당한 예의(禮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추측건대 서점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닫은 것일 것이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서점이 여섯 곳이나 있었다. 그중 두 곳은 학교 앞에 자리해 주로 학생들의 참고서나 교재 판매하는 곳이라 제외하고라도 네 곳이나 되던 것이 하나, 둘 차례대로 문을 닫고 오 년여 전부터 하나 남아 어렵사리 명맥 이어오던 곳이 없어져 상실감이 더 컸다. 지금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폐점은 어느 한 날 주인과 나누었던 이야기, 업의 부진이 온라인 서점과 시내의 대형 서점에게 밀려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책을 읽지 않는 세태가 가장 크지 않겠냐며 서점 한 곳에 시선 주며 씁쓸하게 웃던 그때 이미 예고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한 곳, 부친에게서 업 이어받았을 때 나름 각오 다지는 의미로 제법 돈 들여 제작해 서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벽에 나란히 걸어둔 한 쌍의 각자(刻字) 액자인 거기에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몇 년 전 한 자리에서만 대(代) 이어 90여 년 영업해 온 미국 뉴욕의 한 서점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 접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 앞에 길게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더불어 나라 전역에서의 온라인 주문이 평소보다 수십 배 늘어 폐점 위기 넘겼다고 하는 설명 읽고는 비록 먼 타국에서의 일이지만 진심으로 안도하는 마음 들던 것과 함께 우리나라 현 서점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며 몹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서점 직접 방문한 사람들과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회는 서점, 특히 한 자리에서 오래 영업을 한 그곳은 단순한 한 매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며 시나브로 삭막해지는 세태로 인해 얄팍해져만 가는 허기진 영혼(靈魂) 위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 공간, 이를테면 ‘영혼의 슈퍼마켓(Supermarket)’이라는 것이었다.


책을 읽지 않는 세대(世態), 그를 날 세워 비판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조그만큼도 없다. 문을 닫는 서점과 갈수록 경박(輕薄)해지는 세상과의 연관성 들먹이는 따위의 논리적 비약을 할 생각은 더 더군다나 없다. 옛 성현(聖賢)들조차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당대(當代)의 시속(時俗) 따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토로했으니 그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공연히 헛힘만 빼는 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없어진 서점 앞 서성이다 씁쓸하게 뒤돌아서던 그때 문득 떠오르던 한 생각,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券氣).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추사(秋史)가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미에 적어 보낸 탐독(耽讀)에의 당부이자 경구. 그것은 늘 책을 가까이하여 읽고 그를 새겨 교양 두텁게 하면 심신(心身)에서 책의 기운 풍기고 향기가 난다는 뜻일 것인즉 코를 즐겁게 하는 향수는 돈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나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새긴 데서 저절로 우러나는 학식과 고매한 인품은 천금(千金)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니 한시도 게을리하지 말고 읽고 그 뜻 깨달아 체득(體得)하라는 뜻일 것이다.


작년 늦가을 즈음 단풍 곱게 물든 나무 아래 의자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남녀 불문하고 그 또래들이 으레 그렇듯 심심파적으로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 앞 지나면서 본 즉 고맙게도 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를 고맙게 여겨야 하는 것에 고소(苦笑) 금치 못하면서도 걸어가다 멈춰 다시 뒤돌아본 것은 그 모습이 그즈음 절정 이룬 단풍보다 더 곱게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네 서점의 부활을 기대한다. 그리하여 그렇게만 된다면 오래전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그곳 찾았듯 이제는 손자와 손녀의 손을 잡고 찾아가고 싶다. 지금 서른 중반의 딸이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회사 근처의 서점 찾아 책을 고르고 하루 십 분, 단 몇 페이지라도 꾸준하게 그를 읽는 것이 백 마디 말로써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려준 황금은 탕진되어 사라질 수 있지만 그렇듯 뇌리에 각인되어 전승(傳承)되는 독서에의 DNA는 생각의 깊이 날로 더해 그로써 삶을 보는 눈이 더 그윽해질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처럼 서점도 늘 가까운 그곳에 있어 삶의 길 찾는 나그네들의 길잡이 혹은, 등대로 아버지로부터 자녀, 다시 그 자녀에게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늘 올려다 보이게 창이 난 다락방에 놓인 책상과 좌식 의자 하나, 그리고 고배율의 천체망원경 한 대. 이제 내 더 이상 삶의 관성(慣性)에 휘둘리지 않아도 좋은 나이니 가끔이 아니라 내내 다리 뻗고 앉아 책상 위 펼쳐놓은 책을 읽고 밤이면 광활하게 펼쳐진 또 다른 책의 비의(秘義) 독해하며 그간 목전(目前)의 것에만 매몰되어 그 너머의 것들 보지 못했던 근시안적(近視眼的) 삶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 그것이 내 남은 생(生)에서의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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