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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20. 2023

라면 끓이는 저녁

라면 끓이는 날이 잦아지고 있다.

수십여 년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로 금족형(禁足刑)에 처해졌던 아내의 발이

수년 전 비로소 풀렸기 때문이다.

좋다, 참 좋다.

아내가 풀린 발로 국내외 부지런히 다니는 동안 나는

다양한 레시피로 맛있는 라면 잘 끓이는 라면계(界)의

달인(達人) 혹은, 고수(高手)가 되어있을 것이다.      




아내는 친구들과 해외여행 떠났고

차려줄 사람 없는데

배는 슬슬 고프고

끓여놓고 간 국이며

이런저런 반찬 있지만

홀로 먹는 한 끼 위해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것 번거로워

라면 끓이기로 한다.


물이 끓는다.

먼저 수프 넣고

잠시 뒤 라면 넣는다.

계란도 풀어야지.

그래도 뭔가 빠진 것 같아

끓고 있는 라면 본다.

그렇지, 모처럼의 자유와

살짝 찾아든 외로움도 넣고

부엌 창에 어린 매울 듯싶은

붉은 노을도 한 술 떠내어 넣자.


알맞게 익은 라면 먹는다.

홀로 앉은 식탁에서의

가벼운 이 한 끼 식사가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지만

나이 들수록 외로운 젓가락질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법.

삶의 레시피에서

덜어내야 할 것 덜어내고 나면

라면 한 젓가락에

김치 한쪽 곁들인

조촐한 한 끼 식사 같을 것.


그렇더라도 아내여, 돌아오기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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