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개월여를 요양병원 침대에 꼼짝도 못 한 채 누워계시는 어머니께서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내 찾아뵈었을 때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셨다. 참으로 묘한 것이 그날 마치 어머니께서 그렇게 물으실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집 나설 때 아파트 화단에 한 그루로 외롭게 서 있는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 활짝 핀 것을 한참이나 서서 올려다본 터였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그 물음에 곱게도 피었노라 금세 답할 수 있던 것을 쉬이 답하지 못하고 필 때는 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며 얼버무리듯 말하고 말았다.
그날, 섭리에 따라 때맞춰 꽃 핀 것이 무슨 죄(罪)나 비밀(秘密)이라도 되는 양 그를 이실직고(以實直告)하지 못한 것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느닷없이 울음처럼 치밀어 오르던 애틋한 그 무엇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 겪은 일련의 황망했던 일 때문이기도 했었다.
어머님 뵈러 병원 찾을 때마다 새삼 곱씹게 되던 것들. 어머니와 또 다른 누군가의 어머니들, 그리고 시간의 문제일 뿐 살아있으면 그 누구든 그 마지막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노쇠(老衰)와 노추(老醜). 그것이 필연(必然)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겨울 마른 갈대로 몸져누우신 분들 막상 보고 있으면 까닭 모를 애잔함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평생을 허위허위 걸어와 신발 벗고 누운 곳이 야윌 대로 야윈 몸 하나 겨우 눕힌 침대라는 삶의 덧없음에 사로잡혀 마음 어디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몹시도 허허롭던 것이다.
그날, 어머니는 왜 산수유 꽃 피었는지를 물으셨던 것일까?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께서는 그중에서도 유독 산수유 꽃과 백일홍을 좋아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당신의 입으로 말하신 적은 없지만 그 꽃들 보는 어머니의 시선(視線) 주의 깊게 읽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께서는 시공(時空)이 더불어 몸져누워 오직 사위어만 가는 좁은 침대에 누워 오직 하실 일은 그뿐이라는 듯 당신의 마음 깊은 곳, 혹은 기억에다 그 꽃 피우고 계셨던 것일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릴 적 사셨다는 고향(故鄕), 사시는 곳에서 너무 먼 곳이어서 한 번은 버스 여러 번 갈아타는 수고 감내하며 찾아갔고 이후 한참 뒤 한 번은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었다. 처음 그곳 찾았을 때 어머니의 회고인즉 동네가 너무도 많이 변해 사셨던 그때와는 그 모습이며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어머니의 기억(記憶) 속에는 옛 모습 그대로 온전하게 남아있었던 것인지 마을 한가운데 지나 들판으로 흐르던 개천이며 그 양쪽 늘어서 봄이면 온통 노랗게 피어 꽃 대궐 이뤘다는 산수유나무들 있었던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어머니와 그곳을 두 번째 방문했던 것은 어머니 연세 일흔 중반쯤이었고 찾기 몇 달 전 어머니께서 큰 수술받으시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셨던 초여름 무렵이었다. 마치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시듯 바쁘겠지만 다시 한번 그곳엘 가볼 수 없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를 집에 오래 누워계셔서 갑갑하셨던 것이라 여겨 가셔도 이미 산수유 꽃 지고 없을 것이니 바람 쐴 요량이시면 드라이브 겸해서 녹음(綠陰)이며 그때쯤 피는 색색(色色)의 꽃들로 볼만 한 것 많은 인근의 수목원으로 모시겠노라 말하고 어머니의 안색 살핀즉 적이 실망한 표정이셨다.
어머니의 속내 알 길 없는 나로서는 이를테면 덜 힘든 방법 택했던 것인데 그것이 아니구나 싶어 얼른 그러자 말하고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모시러 오겠다고 하자 그제야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셨다.
두 번째 그곳 찾았을 때 어머니는 무엇을 찾으시는 것인지 동네 초입(初入)의 느티나무 그늘에 만들어 놓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가늠하며 한참을 두리번거리시다 어느 한 곳, 이따금 차들 다니는 큰길과 동네 연결하는 양쪽이 온통 밭인 그 사이 그리 넓지 않은 길에 눈길 주시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무슨 말씀인가를 하셨다. 그때는 내 그저 어머니 말씀에 고개만 끄덕였는데 훗날 그를 되새김질할 때마다 그날 그곳에서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세월 되감고 또 감아 이른 그곳에서 누군가의 딸, 그것도 아주 어린 여자아이로 당신의 부모님이 못내 그리워서 하신 말씀이었구나는 애틋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부모님, 그 두 분 중 외조모님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돌아가셔서 잘 알지만 외조부님은 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작고하셔서 전혀 기억에 없는 분이라 어머니에게도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늦은 오후, 부모님이 들일 하러 나가셨다 귀가(歸嫁)하시는 그 무렵쯤 종일토록 집에 있었을 어린 딸은 마치 무엇에라도 끌린 듯 두 분 마중하러 나갔을 것이고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걸어가다 지금 당신께서 보고 계시는 길 어디쯤에서 반갑게 만나 그리도 딸을 어여뻐하셨다던 아버지 등에 업혔을 것이다. 눈에 선한 그 풍경, 딸을 업은 아버지와 뒤를 따르는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 양편의 노란 산수유 꽃. 어느 한 봄날 늦은 오후의 고즈넉한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던 것인데 그때 어린 딸은 꽃도 꽃이지만 아버지의 넓고 튼실했을 그 등에서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溫氣)가 무척이나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고개 돌려 뒤돌아볼 때마다 못내 아련하고 애틋해지는 그리움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다.
산수유 꽃 폈더냐 물으셨던 그 때로부터 석 달 뒤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마침내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다는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식 치르던 내내 내 머릿속 맴돌던 것은 유언(遺言)에 다를 바 없던 어머니의 그 물음에 피어 한창이라는 대답 선뜻 하지 못한 죄송함이었다. 변명 같지만 그때 어머니의 물음에 얼버무리지 않고 내 본 그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은 꽃이 한창이더라는 내 말에 행여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입원하시기 전만 해도 자주 모시고 갔던 산수유 꽃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에 가자는 부탁이라도 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짐작컨대 어머니께서는 그곳을 고향 대신으로 여겨 찾으셨을 것인데 그때 청하셔도 들어줄 수 없던 것은 대퇴부 골절로 일체의 거동을 할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입원하신 지 서너 달쯤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 몹시도 답답해하시는 것 같아 병원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잠시 바람만 쐬어드리고 오겠다며 차에 태워 모시고 나갔다가 약간의 흔들림에도 고통 호소하셔서 얼마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 데다 그 잠시 사이에 다친 부위가 덧난 것인지 다리 전체가 퉁퉁 부어올라 그로부터 한 달여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셨다. 그리하여 그때의 황망했던 일이 다시 되살아나 혹시라도 어머니께서 무리하게 꽃을 보러 가자고 청했을 때의 난감함을 내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꽃이 폈더냐는 어머니의 물음은 꽃보다는 해마다 피는 그 꽃에 부쳐 너무 멀리 걸어와 갈수록 희미해지는 당신의 그리움을 다시금 기억해 내려는 애틋함이나 안간힘 같은 것이었을 것임으로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어야 했다는 후회를 곱씹게 되던 것이었다.
장례식 치르고 얼마 뒤 인근 절에서 사십구재 올리던 중의 어느 여름날, 더워 열어놓은 법당(法堂) 옆문 통해 소나기 그친 후 더 선연해 보이던 백일홍 붉은 꽃 보다 느닷없이 내 울컥해서 그를 달래느라 입 앙다물고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어야 했었다.
오래된 낡은 사진첩 속 너무도 젊고 어여뻐 눈부시기조차 한 어머니가 양산받고 십오여 년 전 작고하신 그러나 그때는 또한, 젊으셨을 아버님과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떠올라서였다. 오래전 여름, 어느 절의 법당 뜨락에 심어놓은 백일홍나무 꽃그늘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