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生)의 제 장례는 (株)개미상조에 맡겨야겠습니다.
그 장례(葬禮)의 우연한 문상객(問喪客) 된 것은
그리도 완강하던 꽃잎 무더기로 져
그 아래가 온통 핏물로 흥건하던
늦여름 한낮의 늙은 백일홍 나무 근처에서였다.
앞소리꾼의 처량한 요령(搖鈴) 소리도
상두꾼들의 만가(輓歌)도
그 어떤 일체의 호곡(號哭)도 없이
그저 묵묵히, 그리고 엄숙하게
장지(葬地)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행렬 지어 가는 무리, 개미들이
매미 주검 운구(運柩)하고 있었다.
삼일장(三日葬)으로는 어림없을
개미들의 느리기만 한 행보(行步)가
수북이 쌓여 꽃무덤 이룬
백일홍 나무 아래 이르렀을 때
문득, 나의 이 조문(弔問)은
매미도, 꽃도 아닌
그리도 무덥고 뜨거웠던
또 한 번의 계절이
이렇듯 스러지고 있구나,는
그 어떤 소회(所懷)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개미들이
수습하고 있는 것은
한낱 매미 주검이 아니라
한여름 더 뜨겁게 달구던
매미의 울음소리이고
백일(百日) 아니라 천일(千日)까지도
내내 붉을 것만 같았던 꽃이
그렇듯 시들어 떨어져 바래는
색(色), 혹은 시간(時間)에 관한
나의 애도(哀悼)인 것이었다.
머지않아 땅밑 어느 곳에서는
거두어 쟁여놓은 소리들이
다시 뜨거운 날 기다리며
암중모색(暗中摸索) 거듭할 것이고
스며든 빛들은 다시
뿌리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반본환원(返本還源), 소멸(消滅)이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