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잡기 전 며칠 동안 이순(耳順) 훌쩍 넘은 겸재의 속내에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수시로 떠올랐다가는 쉬이 가라앉지 않고 떠도는 그 무엇이 있었다. 달포 전 만리재 초입(初入)의 누옥(陋屋)에 기거하던 일생(一生)이 청빈(淸貧)했던 고우(故友)를 문상(問喪)하고 돌아온 직후 시작된 것이 며칠 전 와우산(臥牛山) 자락에 살던 또 다른 벗의 급작스런 죽음 접한 후 더 깊어져 몇 날 며칠을 허허로이 그저 넋 놓고 목멱(木覓)만 쳐다본 것이었다.
산(山)은 장구(長久)한 세월 변함없이 그곳에 우뚝한데 무릇 생(生)은 어찌 그리도 짧아 맺었던 인연(因緣)이며 함께 한 추억(追憶)들이 그렇듯 일순간(一瞬間)에 과거지사(過去之事) 되고 마는 것이더냐는 생각이 한 차례 일더니 도무지 그치지 않고 벌써 여러 날 째 밤낮없이 심신(心身) 온통 붙잡고 놓지 않던 것이었다.
그나마 낮 동안에는 현감(縣監)2)의 소임(所任)에 집중하여 어느 정도는 떨쳐버릴 수 있었으나 저녁 무렵이면 땅거미처럼 슬금슬금 찾아들어 도지는 상념(想念)들로 하여 퇴청(退廳)하려는 육방(六房) 번갈아가며 억지춘향으로 붙들어 앉혀서는 밤 이슥토록 술잔 기울이기도 했으나 별무소용(別無所用), 오히려 허허로움만 더할 뿐이었다. 무상(無常)함, 생(生)이 마치 잠깐 꾼 춘몽(春夢)이거나 해뜨기 직전의 초로(草露)만 같아도무지 마음 둘 곳 없었다.
선대(先代)의 죽음도 애달프기는 하나 지금에 이르러 절친(切親)했던 벗들이 하나, 둘 북망(北邙) 향해 떠나고 보니 그것이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이치(理致)이며 섭리(攝理)임을 알면서도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날은 출타(出他)하기 위해 댓돌에 놓인 목화(木靴) 신으려다 말고 그를 한참이나 들여다본 것도 그즈음 그의 먹먹한 심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었다. 수십 켤레 신발들 닳고 헤질 만큼 걸어온 길이 한편으로는 생(生)이라는 길 없는 길 걸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길 벗들과 함께 오래 걸어왔으나 이제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 달리 하게 되었고 다소(多少)의 전후(前後) 차이만 있을 뿐 그 자신 또한, 머지않아 길이 끊길 것이라는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었다.
아직 여명(黎明)조차 비치지 않는 묘시(卯時) 무렵
겸재(謙齋)는 아무도 대동(帶同)하지 않고 홀로 길을 나섰다.
전날 잠들기 전 머리맡에 준비해 둔
벼루며 지필묵(紙筆墨) 들어있는 꾸러미 손에 들고서였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경칩(驚蟄) 지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데다
해뜨기 전이라 얼굴이며 살갗에 닿는
서늘한 바람에 한기(寒氣)조차 느껴져
몸 으스스 떨리기는 했지만
내내 벼르던 일 결행한다는
결기 때문인지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발밑 어두워 행여
돌부리에라도 채일까 염려되어
행보(行步) 조심스럽게 한 데다
관아(官衙)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터라
그곳, 궁산(宮山)3)입구 이르자 그새 날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산(山)이라고는 하지만
그리 높지 않은 한강(漢江) 변(邊)의 산이라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겸재(謙齋)는 공연히 마음 급해져
산 위로 이어진 소로(小路) 따라 허위허위 올라
마침내 소악루(小岳樓)4)에 이르렀다.
누각 마루 정좌(正坐)한 겸재는
오직 목멱(木覓)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펼쳐놓은 채색(彩色) 비단과
먹 갈아놓은 벼루에 걸쳐놓은
붓이 놓여있었다.
산을 보던 눈길 잠시 거두어
그 발치의 애오개와 만리재
처연한 눈길로 겸재(謙齋)가 일별한 것은
빛과 어둠이 혼재(混在)되어 있는 지금이
이를테면 유명(幽明)의 짧은 한 때로
죽은 벗들과 살아있는 그 자신과의
어찌할 수 없는 경계(境界)이기도 하리라는
애틋한 생각 들어서였다.
이윽고 박명(薄明)의 하늘 서서히 밝아오더니
윤곽만 보이던 목멱(木覓)이 더 또렷해졌고
그 뒤편 하늘이 꼭두서니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깊은숨 들이마셨다 길게 내쉰 후
겸재(謙齋)는 붓을 들었다.
후대(後代)의 사람들이 내 그림들 두고 평(評)하기를
당대(當代)의 진경(眞景) 제법 잘 담아냈다 할 것이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며 금강전도(金剛全圖)는
혼신의 힘 다해 그린 대작(大作)이라
더 후하게 평(評)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백미(白眉)라는
과분한 찬사 더하기도 할 것이다.
그에 비해 목멱조돈(木覓朝暾)이라 이름 붙일
이 작은 그림은 눈에 차지 않고
너그러운 누군가가 있어 고졸(古拙)하다는
평(評) 해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미명(未明)의 누각에 홀로 앉아
그린 이 그림에는
오늘 붉게 떠오르는 해는
어제 일몰(日沒)의 그 해 아니어서
그렇듯 새 해에 의탁(依託)하여
마음 붙잡고 놓지 않는
애잔한 그 무엇 위무(慰撫)하고 싶은
간절함 담았으니 다만, 한 점
그림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후대(後代)의
눈 밝은 뉘 있어 이를 보고
나의 마음 읽어주겠는가?
진경(眞景)이 한낱 풍광(風光)만이 아니라
절친(切親)한 벗들 잃은 애통(哀痛)함과
그로 하여 고적(孤寂)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이의 소회(所懷) 담은 이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의 진경(眞景)임을
미루어 짐작해 주겠는가?
1)목멱조돈(木覓朝暾) :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1742년에 목멱산(지금의 南山)의 일출(日出)을 그린 작품
2)이 작품을 그릴 당시 겸재는 지금의 서울 양천구 일대를 관할하는 양천현감에 재직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