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간호사가 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원이었다고 말하는 게 어색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지만, 갓 졸업한 신규간호사였던 나와 비교하자면 제법 테가 나는 경력간호사가 된 어느 날 나는 또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드릉드릉했다.
이제야 안정적인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굳이 고생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는 많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이것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부분이 참 많이 보였다.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일 때에도, 환자를 간호하는 업무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시간에 최대의 능력치를 꺼내서 최상의 결과를 내야만 하는 일이 당연했고 익숙해야만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월급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현실이 너무나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적응했고 돈은 벌어야 했기 때문에 찰나의 여유가 생기면 그저 뭘 더 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그걸 찾기에 바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직업이었고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는 죄책감 같은 거였다. 그러다 문득 내가 미국에서 간호사를 하고 싶어 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졸업한 지 벌써 3년.
이제 경력도 있는데 지금 준비해서 가는 건 어떨까?
다행히 그 생각을 처음 했던 나와 현재 나의 상황은 좋은 쪽으로 많은 점이 달랐다.
우선 간호사면허를 받았다.
이는 미국간호사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였다. 간호사들 속에 둘러싸여 지내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간호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많은 과정을 이기고 견뎌낸 결과라는 것이었다. 장롱에 넣어둘 만큼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결혼을 했다.
이제 나의 인생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며, 내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실행하기에는 나의 가족의 동의와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나와 의견이 맞다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게 보통 일은 아니다 보니 몇날며칠 고민을 하다가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고 의향을 물어보기로 했다. 의외로 남편은 해외에서 사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고 용감했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수준임에도 지난 몇 번의 해외여행을 경험으로 벌써 미국생활에 빠져들어있었다.
한편으론 그 모습이 우습지만 또 너무 고마웠다. 이미 국내 대기업에서 꽤 오랜 경력을 가진 남편의 입장에서는 갈 수 없다고 말해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남편이 이렇게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심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마지막으로는 간호사로서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나를 환영할만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몇 년 뒤 다가올 베이비붐세대의 은퇴를 예고하면서 경력 있는 해외의 간호인력이 매우 절실하다는 신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워낙 큰 땅덩어리에 3억 이상의 인구가 있으며 그만큼 전국에 엄청난 수와 규모로 대형병원들이 퍼져있고 이것은 미국 내 간호대학 졸업생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인력의 공백이었다.
대부분의 고령간호사들이 몇 년 후부터 은퇴를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는, 경력 있는 아시안 간호사(대부분 필리핀과 인도였지만 사실 일은 한국인이 제일 잘한다고 자부한다!)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한국은 장롱면허로 임상에서 근무하지 않는 간호사가 많지만 그럼에도 병원에서는 매년 젊고 경력이 없는, 말 잘 듣는 신규간호사를 선호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같은 시대에 다른 생각을 하는 나라가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사소하고도 중요한 이유들로 인해 나의 미국행은 결정되었고, 그때의 나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시련과 좌절을 예상치 못하는 해맑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