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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환자

환자와 고객, 그 사이 어딘가

by 미국간호사 Sophia

이번 연재에서는 병동에서 만나는 담당 환자들 중 여러 가지 의미로 기록을 남겨놓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억하고 싶은 좋은 환자이기도 하고, 의학적으로 배울 부분이 있는 사례의 표본이기도 하며, 또는 너무 분통 터질 만큼 빌런이라서 앞으로 또 이런 환자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준비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일 수도 있다.


그 첫 기록으로 시작할 환자는 70대 후반의 백인남성으로 위장에 통증이 있으며 피검사상 간수치가 올라가 있고, 매일 두세 잔의 맥주와 마리화나를 즐기는 분이었다. 다른 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간에 무언가 보이는 게 있어서 우리 병원에 조직검사를 위해 전원 되었다. 의식이 명료하고 걸어 다니는데도 문제가 없으며 입원초반에는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며칠간의 병원생활이 영 적성에 안 맞는 것인지 내가 겨우 하루 맡은 오늘 있는 대로 성질을 내며 말 그대로 지랄 발광하는 상태였다.


최대한 환자의 편안한 밤을 보장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없으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안 하도록 해주려고 했고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은 챙기는 것이 나의 의무이고 책임이기에 설득도 해보았으나 스스로 자신이 아주 고약한 노인네라고 말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이 없는 철면피였다.


낮에 검사했던 조직은 아직 최종결과가 안 나왔지만 의료진들은 기존의 검사들을 종합해서 간암이거나 간농양(감염) 일 것이라 짐작하고 항생제 주사를 쓰고자 했다. 그래서 치료의 필요성과 약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밤동안 4시간마다 확인하는 혈압도 재기 싫다, 당뇨가 있음에도 혈당도 안 잴 거다, 그리고 그 어떤 약도 지금은 필요 없다며 모든 걸 거부하면서 그저 잠을 며칠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오늘은 자는 것에만 집중하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내 담당인 환자이기에 밤동안 큰 문제가 없는지 잘 자고 있는 건지, 주기적으로 방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잠들지 못하는 어르신의 한밤은 지루하고 괴로워 보였다.


도저히 내 말발로는 대화가 안 되는 데다 감염이 의심되어 항생제를 꼭 줘야 했기 때문에 밤당직을 서는 레지던트에게 호출을 해서 함께 그 방에 가서 이야기를 또 시도해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레지던트 앞에서도 온갖 진상을 다 떨어대는 통에 레지던트도 그냥 혀를 내두르며 환자가 말한 기록만 남겨달라고.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냐며 자리를 떴다. 한국처럼 간호사 앞에서는 큰소리 뻥뻥 치다가 의사가 나타나면 얌전해지는 일은 없으니 그나마 공평했달까 ㅎㅎ


결국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포기를 선언하며 약을 주던 뭘 하던 맘대로 하라고 해서 겨우 항생제 주사를 한번 줄 수 있었다. 그것마저도 협조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참 힘든 캐릭터였다.

더 황당한 건 그가 짜증을 낸 이유가 잠을 못자서였는데 잘만하면 자꾸 방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하고 침대도 불편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여기가 호텔인가 병원인가.

침대가 불편하다고 베개를 있는 대로 다 공수해서 8개나 깔아놓은 것을 보고는 포기 ㅎㅎ



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은 이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증도가 높은 곳이다. 미시간 전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환자가 마지막으로 다녀가는 곳이라 웬만큼 큰 병이 아니고서는 입원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일단 모든 검사와 치료에 비용이 많이 들고 인력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데다 그 인력의 몸값도 꽤나 높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수준의 건강상태가 아니고서는 한밤중에 실려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 입원하는 환자들은 혼자서는 거동을 못할 만큼 많이 아프고 의료진의 도움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런 환자를 맡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오늘 같은 환자를 맡게 되면 자기 스스로 보살핌을 받길 포기하는 것이라 좋은 마음으로 끝까지 챙겨주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환자의 병력은 COPD와 당뇨정도라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미국에선 이 정도는 너무 흔하고 이 정도로는 큰 병원에 못 온다- 검사가 끝났으니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올 경우 추후 계획을 위해서 하루정도 더 머물게 돼서 아마 오늘 중으로 퇴원할 것이 예상되긴 한다.


이런 사람은 특별한 결과가 아니어서 그저 잘 퇴원한 후 편한 침대가 있는 집에서 다시 맥주와 마리화나로 해피한 하루를 보내면 만족하겠지 뭐.


도저히 잠을 못 자겠는지 속옷만 입고 빨가벗고 방안에 있다가 온 불을 다 켜놓고 옷 챙겨 입고 뜬금없이 복도 걸으려고 나왔다네. 그래 걷기라도 잘하니까 다행이다. 열심히 걸으시고 퇴원 준비하시죠

나도 당신 같은 환자는 노땡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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