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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을 사는 나는 지금

간호사와 환자로 만난 동갑내기

by 미국간호사 Sophia

딱 하루 내가 맡았던 환자인데 우선 나와 동갑이라는 것과 발렌타인데이가 생일이라는 것이 참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보통 나와 동갑인 환자들을 만나면 내가 건강하다는 사실에 안도와 감사를 하게 되고, 또 아직 젊디 젊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해지는 나였다. 게다가 스윗하게도 발렌타인이 생일이라니! 그러나 전날밤에 환자를 맡았던 동료간호사의 인계를 받고 기록을 보니 매우 비협조적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꽤나 간호하기 힘든 환자라고 했다.


경험상 이런 환자들은 성격이 문제라거나 인격장애라기 보다도 자신의 건강상태나 치료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 현실 상황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고 현타가 오는 그런 때가 많다. 이른바 자신의 상태에서 번아웃을 느낀 경우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간호사로서 내가 맡은 환자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목표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야기를 이미 들었더라도 나는 최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환자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편이다.


인사를 하러 들어가서 하루를 잘 보냈는지 묻고 내 이름과 간호사라는 이야기를 하며 방안에 화이트보드에 내 이름과 조무사의 이름, 오늘 날짜와 요일을 표시하며 환자를 살폈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밝은 표정이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조금 있다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밤근무 때에는 9시 전후로 취침 전 약을 주면서 환자마다 집중적으로 살펴야 할 건강문제에 대해 신체사정 및 질문을 하고 환자의 필요한 부분을 파악하느라 가장 시간을 많이 소요하고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이런저런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상황에서 이제 겨우 40대가 된 나이임에도 20대의 젊은 때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고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거력과 현재병력은 더 안타까웠다. 이유를 모를 신장염증과 그로 인한 여러 번의 시술을 겪고, 또다시 재발하는 과정에서 방광염과 또 다른 감염으로 인해 대장절제와 자궁절제 등 참으로 많은 수술과 고생을 해온 상태였다. 보통 그렇게 오랜 기간 건강문제로 고생을 하다 보면 밝게 지내는 것이 참 어려운데 심지어 자기가 낳은 세명의 아이들 중 하나는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다른 아이 하나는 자폐이며, 남은 다른 아이도 어떤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이 환자의 삶의 난이도는 얼마나 높은 것이며 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놓는 환자를 보며, 나 역시 과거의 언젠가 그리 친하지 않았던 누군가에게 나의 외로움과 힘든 현실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 너덜너덜했고 친한 사람들은 친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렇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만 같던 사람을 만나자 다시는 없을 기회인 것처럼 나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이해가 되었다.


내가 이민자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배려 없는 속사포 영어를 집중해서 들으며 최선을 다해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추임새를 넣어주며 마음을 다해 위로했다. 동정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고 들어주는 것을 잘하는 나의 천성인 데다 내가 가진 직업이 주는 신뢰가 있었기에 환자와의 심리적 가까움은 간호와 치료를 진행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어쩌면 그 시간이 모든 치료와 간호를 거부하던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힘을 내게 해줄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힘든 삶을 잘 이겨내려 노력하는 부분이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마음을 그대로 담아 응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반성한다고도 고백했다. 이렇게 건강함에도 불평하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감사한 마음만으로 살아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나 삶의 고난과 괴로움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에 따른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고난과 괴로움을 탓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동정받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방법이 가장 쉽기 때문에.

하지만 인생을 넓게 보면 그런 생각과 행동은 내 삶을 좀먹을 뿐, 나를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지도 않고 더욱더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뿐이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긍정과 희망을 찾아내고 끄집어내서 내가 지금 이 시간을 잘 극복하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무언가를 실행해야만 한다.


이후에도 여러 환자들을 만나며 놀라웠던 부분은 누가 봐도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음에도 대책 없이 느껴질 만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본인이 중한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상태의 건강상태와 경제여건에서도 여러 명의 아이를 낳고 또 그들을 정상적으로 키우고 있는 경우를 흔히 봤는데 이는, 나라면 도저히 엄두 내지 못할 부분이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결혼을 하고 또는 연애를 하며 아이를 낳고 이들을 어떻게든 잘 키우겠다는 의지로 병을 이겨내고 삶을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다. 그들의 결심이 대단하기도 하고 또, 사람의 인생이란 그런 평범한 일들을 이루었을 때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 계기였다.


한국에서는 너무 많은 환자들과 바쁜 일정들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도 실제로 간호사로 일을 하면서는 사무적이고 최소한의 에너지만 환자에게 소모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나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런 부분을 따져본다면 환자를 한 사람으로, 그리고 삶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훨씬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너무 바쁘다. 그리고 사무적으로 일하는 간호사들, 이곳에서도 아주 많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다수의 간호사들은 그저 돈벌이를 할 수단으로 간호사가 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타적이고 배려심이 많기에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이므로 현실과 이상을 매칭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했던 한국인 이민자 간호사에게, 나의 환자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신의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퇴근하기 전에 나는 오늘내일 쉬는 날이라 어쩌면 다시 일하러 왔을 때 너를 못 볼 수도 있어.라고 말하며 환자를 안아주었다. 지금처럼 긍정적인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그리고 너의 파트너와도 행복한 일상을 보내라며 그렇게 서로에게 웃으며 우린 그렇게 이별을 했다.


퇴원한 이후의 환자의 소식이나 기록은 시스템에 남아있더라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뒤의 이야기는 모른다. 다만, 나에게 이야기했던 그날의 그녀라면 아마도 이번 입원기간 동안 생긴 수많은 어려움들을 또 극복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거움과 행복을 만들어가며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또 나의 환자 한 명과 내 인생의 기억을 한 조각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하루하루가 모여 내가 간호사로 살아가는 시간들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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