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에겐 측은한 환자
70대의 여성이 한밤중에 입원을 했다. 비알콜성 간경화로 인한 복수천자(간이 제기능을 하지 못해서 몸속에 흡수되어야 하는 수분이 배에 차는 것을 빼주는 시술) 이후 시작된 통증에 응급실을 찾았던 것인데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의 원인을 찾고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복수를 빼내는 시술인 복수천자를 다시 할 계획으로 왔다. 오자마자 너무너무 아프다고 말하던 환자에게는 강한 진통제가 처방되지 않았고, 비교적 낮은 강도의 통증에만 사용하는 진통제를 최소 4시간에서 6시간 간격으로만 사용하라고 의사가 처방을 했다. 보통 몸에 들어오는 모든 음식과 수분은 간에서 해독을 하기에 간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하기에 분명히 통증약을 적게 주는 이유가 있을 텐데 환자는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 의사들을 욕하기 시작했고 사라지지 않는 통증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했다. 그때마다 의사에게 그 상황을 알리는 나 역시 답답했다. 하는 수 없이 마사지, 냉온팩, 먹는 것으로 시선 돌리기 등의 방법 등을 이용해서 환자를 밤새 어르고 달래며 하루를 보냈다. 나 역시 환자만큼이나 지치는 밤이었다.
그다음 날도 다시 그 환자를 맡게 되었는데 특별한 처치나 계획이 이뤄진 것이 없었고 환자는 여전히 통증에 지쳐 나가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저녁약을 챙겨주며 만난 환자는 나에게 본인은 통증을 잘 참는 사람이라 끊임없이 아프다, 뭐든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너무 미안하지만 정말 너무 아프고 힘들다는 말을 했는데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이 났다. 그랬더니 환자가 더 미안해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날밤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총동원해서 환자를 보살피며 시간을 보냈고 퇴근 후엔 나까지 환자처럼 온몸에 몸살이 나고 피곤하고 힘든 상태로 집을 향했다.
며칠간 쉬는 날이 지나서 다시 출근을 했을 때는 다른 환자를 맡느라 그 환자를 찾아갈 수는 없었는데 여전히 환자에게 특별히 조치된 것은 없어 보였다. 약 기계에 내 담당환자 약을 가지러 가는 길에 그 환자방을 지났는데 너무도 반갑게 맞아주는 환자를 안아주며 오늘은 좀 어때?라고 물었더니 여전히 통증은 있으며 자기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계획은 있을 것이고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말하고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그 방을 나오고 나니, 조무사가 나한테 뭔가 이야기를 했다. 내용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다른 간호사들과 조무사들에겐 아주 진상환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랬던 환자가 나를 보고 웃으며 반기는 걸 보고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내가 도대체 뭘 해줬기에 저 진상이 다른 표정을 짓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미국에 와서 크게 느낀 차이점 중에 하나는 간호사가 느끼기에 환자가 어느 정도의 선을 넘으면 간호를 거부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로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여기선 자신의 몸과 정신건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가 간호사를 해고(?)시키기도 하고(그 간호사에게 간호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 간호사도 환자를 바꿔달라고 한다. 나는 한국적 마인드가 강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환자가 원하는 걸 해주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해결하는데 이런 걸 보면 미국에는 멘탈이 강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보니 소위 진상환자는 일하는 사람들도 돌아가며 맡도록 배정을 하고 그런 환자들을 간호하다가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동료들 간의 배려를 한다. 그럼에도 환자를 맞춰주기가 너무 힘들기에 우리도 사람인지라 뒤로는 욕하기 마련인데 그런 관심의 중심에 있는 환자가 나를 반기니 그 모습이 이상할 만도 했던 것이다. 여전히 그 환자가 안쓰럽긴 했지만 나 역시 이틀이나 그 환자에게 쏟은 체력이 많아서 섣불리 담당하겠다고는 못하던 차에 다행히 다른 간호사에게 배정이 되었던 날이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고 이틀정도 뒤에 다시 출근을 하니 그 환자는 이미 퇴원을 하고 난 뒤였다. 아픈 부분이 잘 해결되어 집으로 갔기를 바라며 그렇게 그 환자는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갔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익숙한 이름이 내 담당환자로 배정되었고 확인해 보니 그때 그 환자가 더 나빠진 상태로 다시 입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퇴원 후에 잘 지내기를 바라던 내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음은 분명 느꼈다.
인계를 받고 환자 방에 가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를 반기며 울먹이는 그녀를 보며 반갑기도, 안타깝기도 한 만감이 교차했다. 여전히 통증은 계속되고 있고 두 다리가 퉁퉁부어서 감염이 된 상태로 항생제 치료도 추가가 되었다. 참담하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그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병원에 온 환자들을 볼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여기도 사람이 하는 일로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곳이기에 권력과 인맥이 있고, 운과 실력이 교차하며, 어떤 이는 혜택만을 받고 또 어떤 이는 고생만 하다 가기도 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내 환자는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인 데다 원인을 아직도 제대로 찾지 못한 상태로 운도 따르지 않았으며, 약쟁이 환자들도 넉넉히 챙겨주는 통증약을 간부전 때문에 제대로 쓰지도 못해 고생까지 하는 것 같았다.
이런 환자를 만날 때마다 간호사로서의 업무의 한계에 대해 무력감을 많이 느낀다. 내가 독립적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의학적으로는 인정되지만 약물이나 시술, 수술 같은 치료가 아닌 간호에 한정되어 있고 의사가 처방한 것을 그저 따르는 것만이 한계이기 때문에 환자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때에도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밖에 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일하는 많은 한국간호사들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Nurse Practitionor(NP)라는 전문간호사가 되어 의사의 업무를 일부라도 실행하는 직급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왜냐면 그 순간만큼은 권한 밖의 일이라 아픈 환자를 방치하는 것 같은 불편감이 들었기 때문에.
다시 만난 것 자체는 반가웠던 환자였지만 역시 고된 밤근무를 또다시 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하루를 끝으로 나는 또 쉬는 날이었고 그리곤 다시 출근을 했을 때 그 환자는 퇴원을 한 뒤였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남긴 채 퇴원한 환자가 조금은 나아진 상태로 집에 갔기를 바라는 것만이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주었기에 후회는 없었다는 마음이 남아서 그나마 덜 미안했다.
한 달쯤 지났나? 출근한 나에게 부매니저가 와서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어떤 환자가 전해줬으면 하는 편지라고 하면서 내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고 했다. 출근을 하면 항상 제일 바쁜 일들이 몰려있어서 일단 그 종이는 읽지도 못한 채 챙겨두고 해야 하는 일들을 급한 일들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받아본 종이라서 무슨 내용이 있을지 예상도 안되었다.
저녁약을 돌리고, 환자들이 각기 원하는 요구사항들과 필요한 처치를 끝내고 마침내 차팅을 하기 위해 잠시 앉았을 때, 그 종이의 존재가 떠올랐다. 그래서 커피를 한 모금하고 그 종이를 읽어나갔다.
내가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환자가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극진히 돌봐주었던 프로정신과 측은지심이 가득한 1명의 조무사와 3명의 간호사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이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며 꼭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엔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미국에 와서 살아남으려 고군분투하면서도 아픈 사람에게 인간적인 배려와 간호를 하려고 노력해 왔던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 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이 편지가 더욱 나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 환자가 언급한 간호사와 조무사들 중에 경력이 20년 이하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곳에서 일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목표라서 이 직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이 자리마저 지키지 못할까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던 때였다. 그때 이 환자의 편지 한 장이 나에겐 지금껏 열심히 해온 것이 맞는 길이었고 그만큼 인정받은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밤새워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그런 상태의 환자를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그게 시작이었는지 그 뒤로는 비슷한 환자들을 가끔씩 만나게 되었고, 가능하면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일하려 하고 있다. 환자의 기록들을 보며 왜 이런 처치와 치료를 하는지 가능하면 다 보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진심을 다해서 환자를 보기는 하지만 이 일이 참 힘든 일인건 맞다는 생각을 한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그 인생에서 가장 힘든 상태에서 병원에 오기 때문에 모든 인생사를 다 보고 더럽고 치사한 꼴도 다 겪는 것 같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지켜가며 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과연 나는 성장할까? 아니면 넌덜머리가 날까?
오늘도 이상과 현실 가운데 아슬아슬한 중 타기를 하며 딜레마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토닥인다. 보람과 사명감이 없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저 돈 몇 푼을 바라보고 일하는 건 나를 더 갉아먹을 뿐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일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그런 금전적 보상도 충분치 않으면서 보람과 사명감을 강요하며 순순히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분위기 속에서 일해왔던 것이 당연한 환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내 일에 대해 권한과 그만한 책임을 가지지만 나의 일 자체를 존중해 주는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있고, 궁금하거나 불확실한 것들을 물어보거나 확인하는 데 어떠한 수모와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경력이 쌓일수록 매년 더 많은 이직의 기회와 연봉이 보장된다.
미국에 온다는 것이, 특히 중년의 나이에 전혀 다른 언어로 살아가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잘 알았음에도 내가 이곳에 이민이라는 선택을 했던 이유도 결국은 이런 부분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난 여전히 보람과 사명감을 강요하는 분위기 속에서 모르는 것을 물으면 바보취급을 당하고, 경력이 많을수록 오히려 급여를 후려치기 당하는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나를 깎아내리며 직장을 다녔을 것이다. 그나마도 전문직이기에 우리들끼리의 경쟁이라 열악한 환경에서라도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감사한 직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환경에 굴복하고 순순히 복종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는 곳에서 자존감을 지키며 일하고 또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이곳에서 적응하는 삶은 쉽지 않지만 더 많은 부분에 대해서 만족한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거나, 젊기에 얼마든지 도전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무조건 시도해 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고 또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진상으로만 남았을 이상한 여자가 측은지심을 느껴서 진심을 다해 간호했다는 이유로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당위성을 만들어준 나의 이상하고도 측은한 그녀에게 오늘도 감사하며 또한 그녀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