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간호사로 환자 3명 보기
출근이 참 하기 싫어지는 시즌이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니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마냥 쉬고 싶기만 하기도 하고 나간 멤버가 몇 명인데 여전히 나이트멤버는 채워지지 않아서 연일 숏스텝(short staff)이라 매번 쉬는 날 크리티컬페이를 들먹이며 연락을 받아서일까?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일단 체력이 안 따라주고, 둘째로 세금을 떼고 나면 실제로 받는 돈은 엄청 이득이라고 하기엔 애매해서 나는 눈 딱 감고 연락이 와도 모른 채 하는 중이다.
오늘은 다행히 하루짜리 근무라서 잘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어사인에 내가 차지널스 차례가 아닌데도 떡하니 이름이 적혀있어서 바꿔달라고 했다.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내 이름을 잘못 적어놓은 상황이다. 이게 벌써 두 번째다. 이제 미국문화에 많이 적응해서 이런 건 바로바로 따진다 ㅎㅎ. 다행히 착하고 일 잘하는 간호사 K가 있어서 쉽게 바꿀 수 있었다. 밤 11시까지는 나이트 간호사를 5명으로 배정해 줘서 환자를 4명만 보는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려는데 빈방이 2개다. 그 말은 2명으로 근무를 시작한다는 뜻. 입원환자가 올 거지만 그전까지는 합법적으로(?) 2명만 전담한다는 뜻. 게다가 오늘은 정규약도 11시부터 있는 환자들이라 너무나 여유로웠다.
11시가 되기 전에 스태핑이 다시 정리되는데 9시쯤 갑자기 다른 간호사들이 서로 무슨 이야기를 하더니 오늘은 밤에 평소처럼 5명이 아닌 4명씩만 환자를 보면 된다는 거다. 이게 웬 떡인가! 그 시간에도 나는 여전히 빈방 두 개인 상태였다. 이렇게 쭉 4명만 간호하면 된다니! 꿈인가? 그러다 자정쯤 입원환자 한 명을 받았는데 바이탈도 안정적이고 검사를 위해 입원한 사람이라 특별히 약을 주거나 챙길 것 없이 금식시키면서 잠만 잘 잘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쉬운 케이스였고 환자도 참 나이스했다. 그래서 더 친절히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굿나잇했다.
이렇게 밤이 길게 느껴진 적이 참 오랜만이었다. 항상 미친 듯 바쁜 밤을 보내느라 인계가 준비되지 못한 때가 더 많았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땀에 절어 끈적이는 스크럽을 입고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런 날도 있기에 버티는 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집에서 싸 온 간식을 먹었다. 세상에나, 이런 날이 진짜 있단 말인가!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우리에겐 절대 해서 안 되는 단어가 있다. Q word. Queit 하다는 말은, 절대로, 함부로 꺼내면 안 되는 간호사들 사이의 금기어다. 만일 누군가 한가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모든 평화와 안정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임상에 있는 간호사들은 다 아는 징크스다. 그래서 우리는 무사히 밤을 이대로 보내기 위해서 누구 하나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여유롭게 차팅도 하고, 환자 차트도 꼼꼼히 읽어가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확실히 내가 담당하는 환자의 수가 하나 줄어들자, 해줄 수 있는 간호의 질은 정말 좋아졌다. 환자들에게 할애하는 시간도 더 길어지고, 환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일들도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해 보면서 제대로 된 간호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게다가 여전히 방 하나는 비어 있어서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에 대한 긴장감은 있었지만 이미 어떤 환자가 오게 될지 배정이 되어 있어서 최대한 환자파악을 해둔 상태였고, 그 방은 밤새 빈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결국 인계시간이 임박해서야 곧 환자를 우리 쪽으로 보낼 거라는 다른 병원 담당간호사의 인계전화를 받았다. 이미 시간은 6:30이었고 아무리 빨리 와도 30분은 걸리기 때문에 내가 그 환자를 받을 수는 없었다. 상대병원에서 인계를 해주는 대로 빈종이에 환자정보를 받아 적었고 그 종이 그대로 데이간호사에게 넘겨주고는 퇴근을 했다.
그간 너무 힘든 근무가 있을 때마다 이 일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할까 고민을 했는데 오늘 같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행운 같은 일들로 또 한 고비를 넘기는가 보다. 사실 익숙해질 만하면 또 힘든 환자를 맡고, 힘들어서 못하겠다 싶으면 쉬는 날이 오는 패턴의 반복으로 거의 1년을 버텨왔다. 한국에서 느꼈던 힘듦과는 또 다른 분야의 힘듦이 이곳에도 있기에, 임상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의 고충은 어디를 가나 다 같다는 생각이 요즘따라 너무 많이 드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면 원래 내가 잘해왔던 경력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고, 아예 임상이 아닌 다른 분야로 길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붙들어가며 출근을 하던 요즘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같은 경험을 하니 숨 쉴 구멍이 생겨서 웃으며 퇴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 기뻤던 소식은 급여인상. 내가 딜하지 않아도 알아서 매칭해 준 급여는 내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이미 한국의 경력을 인정받아서 온 것이기에 실제로 여기서 일한 간호사들보다 급여가 적었다고 해도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이민수속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처음 제시받았던 급여에서 인플레이션 상승분을 계속 적용받아왔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내 시급을 제대로 책정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채 1년도 채우지 못한 기간에 급여 인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무런 기대가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새로 책정된 내 시급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간 내 경력이 제대로 매칭이 안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올려준 만큼 앞으로 엄청나게 일을 시킬 거라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계산한 게 아니기만을 바라고 있다. 다행히 급여가 적용된 후 한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올려준 시급을 기준으로 페이첵을 받고 있다. 잘못 적은 게 아닌가 보다.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엄청난 공로를 세운다고 해도 나에게 주어지는 비용은 변함이 없다는 것에서 최소한의 역할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내가 제대로 일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잘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안정적인 비용을 계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아직은 여전히 이곳에서 아주 편안하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마음보다는 적응하고 있고, 모르는 것이 많아서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다는 생각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시간을 채워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만큼의 비용을 받는 것에 다행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 또한 나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일한 시간에 대한 값어치이기에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서 앞으로는 나의 능력을 살려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에 도전하고 꾸준히 유지하면서 직장인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지만 직장인으로 일하는 부분을 겸한다고 해도 그저 돈을 위해 일하는 삶이 아닌, 내 직업이 주는 사명감과 보람에 대해 좀 더 마음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려고 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는 많은 일들을 도전하고 경험했었다. 책을 쓰고, 영어를 가르치고, 내 직업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이지만 관심분야에서 사업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에는 성과가 있는 것만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남에게 내가 어떤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성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도전과 경험이 지금에서야 내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드는 연습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보다는 경쟁이 적고 기회가 많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준비 중이다. 그리고 그 일들은 결과에 기준을 두기보다는 시작해서 나 스스로 무언가를 개척해 나간다는 것에 중점을 둘 생각이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근무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과 계획을 세울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 기뻤다. 만일 지금도 한국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전혀 이런 생각을 할만한 여유와 조건을 가지지 못했을 거라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하고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은 안 하니만 못하다는 인식이 강하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을 자신하지 못하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힘든 근무이지만 12시간을 근무하기에 한주에 3일만 할애하면 그 이외의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고, 퇴근하고 나면 내가 해 놓은 일들에 대해 누구도 간섭하거나 확인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클락아웃(clock out)하는 그 순간 나는 간호사가 아닌 나 자신으로 퇴근을 할 수 있는 이곳의 환경은 정말 너무나 좋다.
만일 지금 누군가 나의 노력과 끈기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대우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내가 있는 곳에서 더 애쓰며 인정받으려고 고군분투하기보다는 조금만 눈을 돌리면 지금 정도의 노력으로도 인정받고 만족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있는 이곳, 미국이 아니더라도 세계는 넓고 내 한 인생을 멋지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은 어딘가에는 있다.
혹시 나이 때문에 망설이는가? 나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가난했던 29살에 간호대학에 진학해서 30대에 신규간호사가 되었고, 해외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돈과 노력을 들이며 40대 중반에 미국간호사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50대가 되기 전에 또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고 계속 행복을 느끼고 살게 해주고 싶어 오늘도 노력 중이다.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내 처지와 환경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지금 내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고 준비해서 이루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도전했던 나를 칭찬하고 다독이며 내 인생을 살아가면 된다. 그러면 꼭 내가 계획한 것과 100% 맞지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하고 멋진 삶을 만나게 될 것이다.
꾸준히 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과 우연한 인연으로 나의 일상을 알게 되신 모든 분들이 오늘보다는 내일 좀 더 희망과 행복이 담긴 하루를 만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금 더 먼저 그 길에 발을 들인 사람으로서, 고민이나 궁금증이 있다면 언제든 대답해 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