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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08. 2022

카페 이마

윤수진이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는 법 (2)

나의 주말은 대체로 여유롭다.


미술관은 홀로 주말을 보내는 이들에게 최적인 장소다. 고맙게도 서울엔 시내 곳곳에 크고 작은 미술관이 많다. 날이 궂어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땐 미술관을 찾는다. 현실의 팍팍함에 지쳐 감성 수혈이 시급할 때도 미술관을 찾는다. 미술관에서는 혼자인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작품으로 향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옷을 거꾸로 입고 나타나더라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예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다. 깊은 해석과 설명이 필요한 작품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눈에 보았을 때 멋지다 혹은 별로다 라는 판단이 가능한 명확한 작품이 좋았다. 최근보다는 반세기 전쯤의 작품들이 더 쉽고 명확해 아름다웠다.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긴 과거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니 새로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예술이 비슷하지 않을까? 음악만 해도 그렇다. 이미 선대의 많은 이들이 선점해 놓은 곱디 고운 멜로디들과 겹치지 않게 본인만의 멜로디를 진행시켜야 하다니. 지뢰밭에서 지뢰가 없는 부분만을 피해서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는 것과 비슷할 거다.


서울의 많은 미술관은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주로 광화문의 일민 미술관이나 경복궁역 근처의 국립 현대 미술관을 방문했다. 가끔 바람을 쐬고 싶으면 4호선을 타고 과천에 있는 국립 현대 미술관에 갔다. 가을이 와 단풍이 예쁘게 내려앉을 때쯤에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이나 시립미술관을 가기도 했다. 이따금 좋아하는 전시가 열리면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 갔다. 예술의 전당의 넓은 광장이 마음에 들었다. 전시를 보고 나면 광장 한편의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노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탁 트인 잔디밭에서 들으니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조금씩 다른 모습의 미술관들 덕분에 질리지 않고 주말을 보낸다.


가장 많이 찾는 미술관은 일민 미술관이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 쉽고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이 좋았다. 전시 규모가 작고 난해한 전시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일민 미술관에 가는 횟수가 늘어나자 연간 회원권을 끊었다. 연간 회원권에는 일민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카페 이마의 10% 할인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페 이마를 자주 가는 나로서는 썩 마음에 드는 혜택이었다. 광화문 사거리 한복판에 위치하다 보니 주말의 카페 이마엔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매번 오픈 시간에 맞추어 방문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항상 토마토 칠리 페퍼 함박스테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4가지 베리 와플을 시킨다. 옆자리에 앉은 3인 가족이 나보다 더 적게 시키는 것을 보고 괜히 머쓱해지곤 했지만 뭐 하나 빼기 어려운 꼭 맞는 조합이었다. 묵직한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반숙 계란 프라이와 함박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자른다. 넉넉히 뿌려진 칠리소스를 적당량 묻혀 밥과 계란과 고기를 한입에 넣는다. 일반 함박의 달달함 대신 칠리소스의 개운함이 있어 한 그릇을 다 먹도록 질리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와플과 먹을 커피를 남겨야 하니 적당히 배분해서 마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접시가 거의 비워져 갈 때쯤 베리 와플이 나왔다. 하겐다즈의 딸기 아이스크림이 와플 위에 올라가 있고 그 주위에 생크림과 각종 베리가 넉넉히 얹어져 있었다. 와플이 눅눅해지지 않게 아이스크림을 들어 와플 옆으로 옮겼다. 잊지 않고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린다. 평소에는 제로콜라만 먹지만 여기서의 시럽은 필수요소일 수밖에. 당분과 칼로리는 잠시 잊기로 했다. 올려진 베리와 아이스크림과 와플을 포크로 잘 찍어 한입에 넣었다. 적당히 남은 아메리카노가 와플의 달큰함을 개운하게 씻어주었다.


배가 빵빵해지면 같은 건물의 일민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날은 오랜만에 도슨트 해설이 있는 전시였다.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미술관에서 도슨트가 직접 해주는 해설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개인의 해석에 맡기는 자유로운 감상보다는 명확한 설명이 좋았다. 한 반에 40명이 꽉 찬 교실에서 받은 주입식 교육 때문인지 이 그림은 어떤 작품이고 어떤 배경이 있는지 설명은 듣고 나서야 제대로 감상한 것 같았다. 로비에는 벌써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해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전시는 사진전. 중년의 여성 도슨트가 마이크 볼륨을 조정하고 해설을 시작할 채비를 했다. 새로운 전시가 열린 첫 주말이었고 그렇기에 도슨트도 이 전시 해설은 처음이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의 해설이니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우리는 박수로 환영했다.


힘찬 박수가 무색하게 해설은 시작부터 난관이 많았다. 한 명의 작품이 아닌 여러 사진작가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다 보니 나열해야 하는 작가의 이름이 엄청났다. 이 작품은 김철수 스튜디오의 김철수 작가와 김영희 작가 김민수 작가가 함께 참여한 작품이고 옆에 있는 이 작품은 스튜디오 블루의 김미숙, 이영호, 데이비드 스미스,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잘 구분되지 않는 비슷비슷한 이름이 줄줄이 들려왔다. 도슨트의 바로 옆에서 해설을 듣던 나는 그녀의 손에서 꼭 쥐어진 쪽지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작가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해설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중간중간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겪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공감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설에 방해가 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KF94 마스크가 야속했다. 아니지 코로나가 야속했다. 마이크까지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음을 주기적으로 내뱉었다. 열댓 명으로 시작한 그룹은 1층의 전시 해설이 끝나자 반 정도로 줄었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이 꽤 가팔랐다. 도슨트의 숨도 덩달아 더욱 가빠지기 시작했다. 2층 전시는 더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고 도슨트는 더 많은 이름을 나열했다. 이름이 적힌 쪽지는 점점 땀으로 젖어갔다. 2층의 전시 해설이 끝날 무렵 어느새 도슨트 옆에는 나와 또 다른 이 한 명 둘 만이 남아있었다. 쪽지에서 눈을 뗀 해설사는 우리 둘만 남아버린 모습을 보더니 끼익대던 마이크를 껐다. 번질 대로 번져 구겨진 쪽지는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계속 방해하던 마이크가 없어지자 미술관이 한결 고요해졌다. 우리 셋은 전시를 같이 보러 온 친구처럼 마지막 전시실인 3층으로 향했다. 나도 또 다른 관람객도 도슨트도 사실 잘 알지 못하던 낯선 사진작가들의 이름과 스튜디오 정보 대신 우리는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슨트가 작가의 경력이나 작품에 관련된 소소한 일화를 이야기해주면 우리 둘은 머리에 떠오르는 아무 생각이나 내뱉었다. 저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요. 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요? 모델 자세가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정제되지 않은 일차원 적인 감상평들이 오갔고 몇 번의 조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전 어느 전시의 도슨트 해설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시간을 맞춰간 적이 있었다. 목소리가 좋기로 유명한 연예인이 녹음했다는 음성 해설도 찾아 듣곤 했다. 물론 모두 괜찮은 경험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쩌면 실패일지 모르는 이날의 해설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날 우리와 함께했던 도슨트는 다음 해설에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했을지 모른다. 마이크 스피커를 교체하고 마스크도 숨쉬기 편한 종류로 바꾸고 말이다. 쪽지가 필요하지 않도록 작가의 이름도 더욱 철저하게 외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면 그날 셋이 함께했던 그날의 해설을 한번 더 듣고 싶다. 어쩌면 나는 유려한 설명과 대단한 해설이 필요했던 게 아닐지 모른다. 함께 전시를 보며 대단치 않은 감상을 공유할 누군가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누구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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