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l Camino de Santiago’ 혹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곱의 무덤이 있는 천주교의 성지 ‘Santiago de Compostela’(이하 산티아고)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 어떤 종교도 갖지 않은 내가 이 길을 걸은 이유는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20대를 다양한 경험을 하며 보내기로 결정했고 장교로 임관하기 전, 마지막 해외여행을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다른 어떤 도전을 하고자 하였을 때, 어느 누군가 이야기했던 순례자의 길이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산티아고에 이르는 100여 개가 넘는 다양한 길 중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순례자의 길을 시작을 한 이유도 길을 걷게 된 이유와 마찬가지로 특별하지 않다. 내게 주어진 3주 정도의 일정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발지로 삼는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의 일정을 소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3주라는 기간으로 걸을 수 있는 출발지를 찾아보았고 그 길이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이었을 뿐이다.
순례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한 뒤 관련 영화와 책, 후기 등을 찾아보며 나는 낭만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환상에 사로잡혀 길을 걷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 75L 배낭에 DSLR, 삼각대, 카메라 가방까지 넣어 어느 누구도 매일 하루에 2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사람이 메는 가방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말 그대로 ‘거대한’ 가방을 메고서는 길을 걸었으니 말이다. 길을 걷고 돌아온 나는 걸었던 그 순간순간들이 담긴 카메라를 가져갔던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길을 걷고 있던 나에게는 가장 버려 버리고 싶은 무거운 짐일 뿐이었다. 무식하게 큰 돌덩이 같은 배낭을 차치하고서도 나의 준비는 미숙하기 짝이 없었는데 언제 어느 도시에 도착해야 하는지, 경유 도시의 식당이나 숙소는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다음 도시를 갈 것인지 등 명확히 계획을 정리하지 않은 채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순례자의 길을 시작한다는 것’에만 몰두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길을 걷다 보면 다른 여행지에서처럼 분명 사람을 만날 테고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낭만적인 착각을 비웃듯 결과적으로 나와 18일의 순례 기간 동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순례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조차 보지 못 했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나니 여러 한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순례자의 길은 보통 날씨가 좋은 여름에 많이 걷고 그 시기에도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을 걷는 순례자는 별로 없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보통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 공식적으로는 말을 타고 걸을 수도 있지만 (예전의 전통을 이어가는 의미) 요즘에는 말을 타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세 가지 방법 외의 다른 방식으로 가는 순례자들은 이 길을 관리하는 순례자 협회에서 발급해주는 공식 크레덴셜(순례자 여권)과 크레덴셜에 찍는 세요(도장)로 인정해주는 순례 증명서를 받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당연히 모르던 나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까지 킥보드를 이용했다. 다행히도 나는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아 순례 증명서까지 받았지만 원래는 인정을 해주지 않는 방식이다.
내가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탈 것으로 굳이 킥보드를 선택한 이유도 역시 뚜렷하거나 계획적이지 않았다. 리스본에서 순례자의 길을 걷는 데 필요한 물품을 사러 갔을 때 킥보드가 눈에 띄었고 킥보드를 타고 간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충동적으로 사버렸다. 덕분에 나는 리스본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포르투갈 순례자의 길을 세계 최초로(거의 확실한 아마도) 킥보드로 걸은 사람이 되었다.
특별하지 않은 24살의 남자가 특별하지 않은 이유로 세계 최초로 리스본에서 산티아고까지 614km에 달하는 거리(가이드북 기준)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킥보드를 타고 18일 동안 걸은 이야기는 낯선 세계에서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