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차 - 첫 부엔 까미노(Buen Camino)

by 잼 매니저

2일 차 - 첫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순례자로서 보낸 첫날밤은 불편하고 추웠다. 목토시를 하고 침낭 위로 두터운 담요를 여러 겹 덮었음에도 불편함과 추위에 잠에서 여러 번 깼다. 다행히 피곤함에 금방 다시 잠에 들었지만 잠깐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텅 빈 공간에서 느껴지는 서늘함과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 때문인지 어제 저녁식사를 하고 바로 침낭에 들어가 11시간 정도를 잤음에도 몸이 가볍지 않았다. 7시에 맞춰둔 알람이 울려 침낭에서 나와 기지개를 폈다. 몽롱한 정신과 나른한 몸을 깨우고 나니 잠을 푹 못 잔 탓인지 열이 확 오르면서 감기 기운이 올라왔다. 혹시 몰라 공항 약국에서 사 둔 감기약을 먹고 어젯밤 널어놓은 빨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축축한 빨래들은 안 그래도 무거운 나의 배낭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첫날밤 잠자리.

잠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다 싼 후 창밖으로 날씨를 보니 짙은 안개로 어제는 선명히 앞에 있던 건너편 건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 잡고는 배낭을 메고 소방서를 나왔다. 쌀쌀한 날씨에 목토시와 장갑을 꺼내고는 소방서를 향해 짧은 인사를 하고 다음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킥보드에 올라 발을 굴리니 어제와 다르게 몸이 무겁고 한쪽 다리에 피로가 쌓였음이 느껴졌다.


‘돌덩이 같은 가방을 메고 오랜 시간 한 발로 킥보드를 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구나 ‘


깨달음을 얻고 오늘부터는 발을 번갈아 가며 타기로 결심했다.


찾으려고 하니 노란 화살표가 어제보다 수월하게 찾아졌다. 노란 화살표가 보이면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발견할 때마다 느껴지는 반가움이 느껴져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구글 맵과 노란 화살표로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다음 도시를 향해서 가다 ‘순례자의 길이 킥보드를 타기에 나쁘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마을을 벗어나며 내가 막연히 상상했었던 순례자의 길다운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내가 걷게 될 것이라 상상했던 순례자의 길이란 끝없이 펼쳐지는 흙길과 그 옆으로는 시골의 정취가 느껴지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길이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 홀로 흙길 위에 있으니 낭만은커녕 으스스한 분위기에 괜히 주위를 한 번씩 둘러보게 되었다.


IMG_5382.JPG 괜히 주위를 한 번씩 둘러본 길.


갈림길이 나를 고민하게 할 때마다 노란 화살표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고, 나는 진정한 성인은 이 노란 화살표를 손수 하나하나 그리며 걸어갔던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몇 시간씩 걷고 킥보드를 타며 무슨 생각들을 했는가 하면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말한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처럼 흘러가는, 잡히지 않는 생각들을 했다. 허나 결코, 이런 생각들이 신체적인 힘듦을 덜어주지는 못했으니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카메라를 던져버리고 싶은 욕망이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사람의 형체가 눈에 띄었다. 그 형체가 나와 같은 순례자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에 생각이 미치자, 피로와 허기짐에 지친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그 형체를 따라 잡기 위해 발을 열심히 굴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타-악. … 타-악.


점점 뚜렷해지는 그의 형체.


타-악. … 타악.


커다란 배낭에 나무 지팡이.


타악. 타악. 타악.


순례자다!


확신이 들자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그 혹은 그녀의 뒷모습에 한국 사람이라면 사랑 혹은 우정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설렘을 숨긴 채 옆으로 가 속도를 맞추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이 나의 반가움을 덜지는 못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그는 그레고리라는 폴란드 인으로 내가 출발한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포르투갈 최남단 도시에서 순례자의 길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와는 다르게 그는 텐트를 메고 다니며 알베르게를 이용하지 않고 잠을 텐트에서 해결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누군가 내게 대단하다고 할 때 내가 느끼는 와 닿지 않음을 그 역시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는데 모순적이게도 이 때문에 우리는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 역시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균형 있는 대화가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 서로에게 묻는 상투적인 질문들이 오고 가는 중에 길을 걷는 이유를 묻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까 묻지 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레고리가 내게 먼저 물었다.


“너는 왜 순례자의 길을 걸어?”


뚜렷한 목적 없이 시작한 길이지만 누군가 내게 왜 길을 걷느냐 물었을 때에 대한 대답을 미리 생각해두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했던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처럼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경험.”


‘나는 20대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기로 결정했고 이 길을 걷는 것은 그 일부분이야.‘라고 풀어서 말하고 싶었으나, 영어로 이를 전달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될 것으로 판단되어(그럼에도 정확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한 단어로 표현했다. 대답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그레고리 역시 한 단어로 답했다.


“종교.”


그에게 있어서 순례자의 길이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서로의 짧은 영어로는 그 의미가 내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기에 묻지 않았다. 내가 ‘경험’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했듯이 그 역시 ‘종교’라는 단어 속에 그만의 함축적인 의미가 담겼으리라 짐작만 했을 뿐이다.


짧은 질문과 간결한 대답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우리는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같이 걸었다. 사람들의 낯선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이질감이 뒤섞인 시선을 외롭게 견뎌내며 혼자만의 속도로 길을 나아가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서로의 속도에 맞춰 같이 시선들을 견디며 걸으니 참 좋았다. 나이도 국적도 다른 낯선 사람이었지만 나처럼 순례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는 그레고리에게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의 존재가 지금 나와 함께 이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 따뜻했다. 이 온기는 오래도록 남아 내가 홀로 길을 나아가며 고독에 몸이 시려올 때 산티아고를 향한 길 위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 줄 것이다.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길을 걷다 보니 저 앞에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었다. 정류장을 지나기 전 그레고리는 다리가 아파 벤치에서 조금 쉬었다가 출발해야겠다며 벤치에 앉았다. 나는 아쉬움을 숨긴 채 그를 바라보며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그에게 했다.(그와 같이 쉬었다가 함께 길을 걷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 말을 누군가에게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부엔 까미노”


그레고리는 활짝 웃으며 내게 답했다.


“부엔 까미노”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킥보드에 올라 다시금 힘차게 발을 굴렸다.


*부엔 까미노 : Buen Camino. ‘좋은’이라는 형용사에 ‘길’이라는 명사가 붙어 ‘좋은 길’이라는 스페인어이다. 순례자의 길을 걷는 순례자에게 건네는 인사말로 통상 ‘즐거운 순례길 되세요.’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레고리를 뒤로하고 발을 굴리며 나는 생각했다. 왜 나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온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이토록 반가웠을까? 어떻게 나는 그에게 이처럼 큰 위안과 온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내가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순례자의 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길을 걸을 때 온종일 느껴지는 시선들 속에 담긴 이질적인 존재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그레고리는 길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이 길을 계속해서 걸을 수 있다. 속력은 다르지만 나와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다. 이 사실들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에게 안정감을 되찾게 해 주었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지인 'Ajambuja'를 약 1km 남기고 대형마트가 보였다. 오래전부터 허기짐을 느끼고 있던 나는 곧장 마트로 들어가 식품 코너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 마트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제부터 계속되었던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의 나는 그레고리와의 만남으로 더 이상 그 시선들에 동요하지 않았다. 먹음직스러운 빵과 함께 1.5L짜리 주스를 계산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는 오늘 절실하게 느꼈던 간식(당과 수분 섭취를 위한)의 필요성에 따라 물과 초콜릿 등을 추가로 구매하였다. 해소된 갈증과 허기짐, 내일 먹을 간식으로 만족스러워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트를 나섰고 얼마 안 남은 오늘의 도시로 향했다.


이번에는 도시에서 방황하지 않고 곧장 소방서를 향해 갔다. 소방대원들에게 순례자임을 밝히고 크레덴셜을 보여주니 세요를 찍어주었다. 크레덴셜을 전해 받으며 조심스레 소방서에서 숙박이 가능한 지 물으니 ‘Ajambuja'의 소방대원들은 안타까워하며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잘 수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도시의 지도를 프린트해서는 펜으로 열심히 호스텔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두세 번의 확인을 거쳐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하고는 90˚로 감사인사를 하였다. 환한 표정의 배웅을 받으며 호스텔에 도착했지만 생각보다 가격이 너무 비쌌다. 1박에 무려 20유로였다. 가격을 듣고는 다음 도시로 가서 잠을 잘까 잠시 생각했지만 히터가 있는 트윈룸을 보고는 바로 20유로를 꺼내 내밀었다. 젖은 빨래,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 몸살 기운 등 여러 핑곗거리가 히터를 본 순간 오늘 호스텔에서 꼭 자야 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순례자의 길 두 번째 날은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 난방 기구에 대한 감사함으로 일찍 마무리했다.


IMG_5409.JPG 크레덴셜에 찍힌 세요.



#알아두면 좋은 정보(tip)

- 물과 간식(되도록 단 것)은 미리 챙겨서 출발하자.

- (겨울철 / 아이폰) 보조 배터리를 챙기자.

- 끼니는 거르지 말고 챙겨먹자.


#오늘 걸은 길

- 출발: 07:56 / 도착: 12:26

- 거리: 약25km

- 경비: 32.62 Euro


KakaoTalk_20190317_223958871.jpg Alhandra - Azambu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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