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차 - 길의 가르침
눈을 떴다. 후두두. 눈을 감았다. 후두두. 다시 눈을 떴고 다시 감았다. 그 사이에도 역시 후두두, 창밖의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학교 가기 전 아침에 늦장을 부리는 학생처럼 내가 늦장을 부린 이유는 꼭 빗소리가 알려주는 오늘의 예상되는 고단한 하루 때문만이 아니었다. 갈수록 쌓여가는 근육의 피로에 지친 내게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안락한 침대와 난로가 ‘일어날까’, ‘조금만 더 누워 있을까’하는 내적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어나라고 이야기를 한 천사(아니 악마인가?)가 결국에는 승리하여 침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커튼을 걷어 젖히자 청각으로만 예상되던 하루의 고단함이 시각적으로 와 닿았다.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며 어제 했던 빨래들을 걷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이 했던 탓인지 몇몇 옷가지들의 끝부분이 다 마르지 않았다. 안타까운 현실을 받아들이며 차곡차곡 흩뿌려 놓았던 짐들을 정리하고 데카트론에서 샀던 판초우의를 꺼냈다. 쓸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3일 차에 쓰게 된 나의 XXL 사이즈의 판초우의는 거대한 돌덩이를 멘 나를 완벽하게 덮어주지 못했다. 다행히 감기 기운은 사라졌기에 약 대신 한숨을 깊게 내어 쉬며 마음을 다잡고는 험난한 오늘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어제의 깨달음에 따라 물을 사기 위해 숙소 바로 아래 상점에 들렀다. 주인은 내게 1.5L 병과 500ml 병을 함께 보여주었다. 나는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할 수는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500ml 페트병으로 손을 뻗쳤다. 주인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심해서 가라는 느낌을 주는 따뜻한 포르투갈 말을 내게 건넸다. 나는 미소로 답하며 상점을 나서 기차역을 향했다. 다음 도시를 가기 위한 길은 기차역 건너편으로 이어져있었기 때문인데, 출근 시간과 겹쳐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을 유유히 킥보드를 끌며 거대한 배낭을 판초우의로 덮은 내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홀로 다른 길을 가야만 하는 나는 생각했다.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은 나를 어떠한 시선과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일상을 벗어난 모험과 여행에 대한 부러움일까 아니면 안정된 일상에 대한 감사함일까?’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적셔지는 흙길, 그 길 양쪽으로 내 키를 훌쩍 넘는 황금빛 갈대가 타라락 타라락 바람에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있었다. 말 그대로 순례자들이 다녔을 법한 이 길은 추적이는 비와 구름에 가려 사라진 태양,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갈대가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한껏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 썩 잘 어울리는 짙은 색 판초우의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킥보드를 탈 수 없는 이 길을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옆에 있었다면 아마 나와 함께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난이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애써 기운을 내며 진흙길이 되어 가고 있는 흙길을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킥보드를 타기 힘들었을 테지만, 비가 내림으로써 끌고 가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질척이는 진흙 속에서 킥보드를 끌고 가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손잡이에 많은 힘을 주어 누르면 진흙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적은 힘을 주면 들고 가는 거나 다름없이 팔에 무리가 갔다. 적당한 압력으로 킥보드가 굴러갈 수 있게끔 만들고 한쪽 팔에 무리가 가지 않게 킥보드의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서 걸어갔다. 이렇게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킥보드는 더 이상 끌리지 않았다.
“제기랄”
킥보드의 바퀴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뇌를 거치지 않은 소리가 나왔다. 바퀴는 진흙 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노란색 물웅덩이. 킥보드를 향해 욕지거리를 한 번 해주고는 흙탕물 앞에 비를 맞으며 쪼그려 앉았다. 손을 오므려 노란 흙탕물을 떠서는 아기를 씻기듯이 킥보드 바퀴를 손수 씻기고는 진흙 묻은 나의 손도 씻어냈다.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부모의 마음으로 너의 물건들을 소중히 하라.’
길이 내게 준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킥보드를 탈 수 있는 도로가 나왔다. 킥보드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나길 간절히 소망했던 나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감사를 전하고는 킥보드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바람과 비는 내 몸을 두들겼고 발목은 뻐근했으며 다리는 후들거렸다. 조금 지나자 물건을 소중히 하라는 길의 가르침은 까맣게 잊히고 머릿속엔 불평불만이 쏟아졌다. 나의 어리석음을 질책이라도 하듯이 아스팔트 도로는 금방 끝이 나고, 다시 킥보드를 ‘끌고 가야만 하는’ 길을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다. 그 길 양 옆으로는 나의 절망적인 심정과는 상반되는 아름다운 노란 꽃밭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나의 모습은 참담했는데, 그 모습이 꼭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가 밖에서부터 나를 적시고 줄줄 새는 땀은 안에서부터 나를 점점 적셔왔다. 판초우의 모자까지 덮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안 젖은 곳 없이 젖어 찝찝함은 둘째 치고 온 몸이 너무나 무거웠다. 물과 비와 땀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진흙탕 길을 킥보드를 끌며 걷고 걸으니 멍청한 생각이 또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을 위해 노란 화살표를 그린 사람보다 킥보드를 탈 수 있는 도로를 만든 사람이 더 성인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지 않을까?’ 같은 사사로운 생각들이….
정말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들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킥보드를 ‘들고 가야만 하는’ 길이 나왔다. ‘끌고’ 가야만 하는 길보다 ‘들고’ 가야만 하는 길이 훨씬 고됐다. 지금까지의 길들이(‘끌고’ 가야만 하는 길) 적당한 완급 조절이 핵심이었다면 앞으로의 길들은(‘들고’ 가야만 하는 길) 힘과 인내만을 요구했다. 온몸이 젖은 상태로 75L의 돌덩이 같은 배낭을 메고 한 손으로 킥보드를 들고 가자니 엄청난 힘과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했다. 엄청남과 끊임없음이 한계를 보이며 킥보드를 던져 버리고 싶어 질 때쯤 길은 내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그 복이란, 킥보드를 탈 수 있는 포장도로였다. 나는 킥보드를 끌며, 들며 인내했고 마침내는 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길 역시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킥보드의 소중함을 알기에는 충분했고 나는 킥보드 위에서 바람을 느끼며 다짐했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킥보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겠다고.
나의 몸 밖에는 물이 차고 넘쳤지만 그에 반해 몸 안에서는 물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500ml 한 병이 내가 가진 식수의 전부였기 때문에 나는 아끼고 아껴 먹고 있었는데 이제 딱 2모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길들에서는 갈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은 정말 심각했다. 오늘의 도시 'Santarem'까지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중간에 물을 살 수 있는 곳은 전혀 나타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마지막 남은 단 2모금의 물을 지금 먹느냐 조금 더 참았다가 나중에 먹느냐 내적 갈등이 절정에 치닫고 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한 그루의 귤나무였다. 주변엔 다른 나무도, 집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탐스러워 보이는 귤이 주렁주렁 맺힌 하나의 나무만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길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나는 주저 없이 가장 잘 익어 맛있어 보이는 열매를 따서 먹었다.
“스하.... 퉤! 퉷!”
달아야만 하는 귤은 달지 않았다. 목마름을 해소해주길 바랐던 귤은 오히려 남아있던 나의 마지막 물 두 모금을 단숨에 들이켜게 만들었다. 내가 방금 뱉어버린 열매는 98%의 신맛과 2%의 단맛을 가진 설익은 귤이었다. 그렇다, 길은 단지 나를 시험한 것이고 나는 당당하게 그 시험에 탈락해 버린 것이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 한 내게는 텅 비어버린 500ml 페트 한 병과 또 하나의 가르침만이 남아 있었다.
‘오해에서 비롯된 섣부른 판단은 상황을 악화시키리라.’
눈앞에 오늘의 목적지의 ‘Santarem'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순례자의 길에게 세 번의 가르침을 내리 받은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단 한 번의 휴식만이 전부였던 5시간에 걸친 강행군과 지독한 갈증은 나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멈추지 않는 비와 1분이라도 빨리 도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갈망이 나를 서두르게 했고 결국엔 흙길을 지나 아스팔트 길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사진 오르막을 끊임없이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도 오르막만 있지는 않고 길고 긴 고통스러운 시간 후에 찾아오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짧은 내리막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까지 길은 내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작은 것에 감사하라.’
도시로 이어지는 짧은 내리막 길이었을 뿐이지만 이 길을 만날 때마다 킥보드에 몸을 올린 상태의 나는 피로, 근육통, 찝찝함 같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잊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길의 가르침에 따라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을 때쯤 생각보다 큰 도시 ‘Santarem'에 도착하였다. 오늘 역시 가장 먼저 도시에 있는 소방서를 찾아갔다. 큰 도시답게 소방서가 몇 군데 있었는데 내가 처음에 도착한 소방서에서 말하길 다른 어떤 소방서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요금을 내야 된다고 하기에(생각보다 비싼) 1초라도 빠르게 쉬고 싶던 나는 가까운 호스텔을 찾아갔다.
오늘 아침까지 마르지 않았던 빨래들과 오늘 흠뻑 젖은 옷들의 빨래와 건조를 부탁하고 너덜너덜해진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는 침대로 쓰러져 들어갔다. 눈을 감으며 나는 바랐다.
‘내일은 오늘 같지만 않기를….’
#알아두면 좋은 정보(tip)
- 무겁더라도 물은 1L 이상 챙기자.
- 적당한 휴식을 취할 것.
- 몇몇 식당에는 순례자를 위한 메뉴가 있다.
#오늘 걸은 길
- 출발: 08:21 / 도착: 14:25
- 거리: 약 32km
- 경비: 32.33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