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 여유와 미소
어제의 아침을 빗소리로 맞이하였다면 오늘의 아침을 맞이해준 것은 어젯밤부터 끊이지 않던 어떤 이의 우렁찬 코골이 소리였다. 나는 소리에 굉장히 예민한 편이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잠을 잘 때 누군가 코를 골거나 이를 갈면 쉬이 잠에 들지 못한다. 어제 역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용납할 수 없는 코골이 소리에 잠에 들지 못하고 새벽 내내 뒤척였다. 어느 순간 잠에 들어 일어나 보니 해가 떠있었지만 아침이 가히 상쾌하지 않았다. 굉장히 불만족스러운 기분의 나는 소리가 나는 근원지를 찾아서는 그쪽을 향해 한 번 인상을 써준 뒤 조식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한 후 세면을 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시간을 보니 8시 반 정도 되어 있었다. 어젯밤 고장 난 아이폰 충전기를 사기 위해 상점이 문을 여는 9시까지 기다릴까 생각해봤지만 출발을 늦추고 싶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겨 호스텔에서 나왔다.
호스텔 직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가보니 산길이 아래로 나있었다. 길에 박혀 있는 돌들이 어제 내린 비 때문에 미끌미끌했기에 조심조심 땅바닥을 보며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의 탁 트인 풍경에 다리는 멈췄고 입에선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눈앞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까지의 나는 오로지 기계처럼 빠르게 다음 도시에 ‘도착’하는 것만을 생각하며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풍경을 즐기거나 휴식을 갖지 않고 길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평안, 여유 등의 가치들을 뒤로한 채 빨리 다음 도시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부터라도 여유를 가지고 이 순례자의 길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출발 전부터 코골이로 짜증이 가득했던 나의 마음은 눈앞의 풍경처럼 탁 트였다. 여유를 찾자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고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걷게 되었다.
1월임에도 불구하고 길옆의 잔디는 푸르렀고 나무들 역시 풍성한 모습이었다. 흠뻑 젖은 나무들이 가득한 숲 속 어딘가에서 새들은 지저귀며 노래했고 작은 벌레들은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서울 한복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이 이곳에 있었다.
산길을 내려오자 갈림길이 나왔다. 내가 내려왔던 길과 이어지는 도로 방향으로는 누군가 표시해둔 노란 X 표시가 있었고 정말 가고 싶지 않게 생긴 진흙길 쪽으로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고민했다. 빠르게 다음 도시에 도착할 수 있지만 고난이 예상되는 첫 번째 길과 조금 돌아갈지는 몰라도 킥보드로 길을 즐길 수 있는 두 번째 길. 여유를 갖기로 한 나는 당연히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알게 모르게 나를 눌러 왔던 압박감에서 해방이 되고 나니 발걸음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단지 길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을 뿐인데 실제적인 변화가 나의 몸에 일어났다.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신체를 만들어준 것일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나는 지금 정신과 신체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투-욱
투-욱
투-욱
일정한 간격으로 도로를 발로 차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귀에 닿았고 파란 하늘에 흩뿌려진 구름들은 빠르게 저 위에서 나를 지나쳐갔다. 바람은 더없이 시원했고 양 옆의 풍경들은 평온했다. 분명 나는 이 순간들에 빠져들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순례자의 길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 위해 읽히지 않는 종잇장을 넘기는 것이었다면 분명 지금의 나는 문장과 단어들을 가슴으로 느끼고 묘사된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도시들을 걸어서 이동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구름이 가깝고 빠르다는 것이다. 증명할 순 없지만 분명 한국에서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구름들보다 나와 가깝고 빠르게 움직였다. 길 위에 멈춰 가만히 빠르게 나아가는 그 구름들을 보고 있자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점점 그것에 빠져들어 넋을 놓고 있으면 나 역시 그 구름들과 함께 어디론가 빨려가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느낌을 표현하자면 마치 우주선을 탄 채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3D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느낄만한 기분이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은 신비로운 느낌만을 주지는 않았다. 비를 머금은 구름들은 내 위를 지나가며 비를 뿌리기도 했는데, 해가 쨍쨍한 늦여름과 비가 추적이는 초가을의 날씨가 1시간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를 스쳐가는 바람, 내 위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흐름을 따라 서두르지 않고 나아갔다. 다리가 아파오면 잠시 앉을 곳을 찾아 신발을 벗고 눈을 감았고 해가 강하게 내리쬐어 땀이 나면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어 몸을 식히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먹구름이 내 위의 하늘을 지나며 비를 쏟아내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씩 상상해 보았을 비가 내리는 곳과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의 경계를 눈으로 좇으며 빵을 우물거렸다. 비구름이 지나가고 햇빛이 촉촉해진 도로를 비출 때도 나는 여전히 우물거리며 먹구름이 지나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 경계는 아름다웠다. 이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도의 광활한 히말라야 산맥을 보고 그 경이로움에 무릎을 꿇은 뒤 웬만한 자연에는 움직이지 않았던 나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일렁이는 마음이 잠잠해진 뒤에야 도로로 나와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도로를 따라서 가다 보니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목적지를 향해 가다 보면 종종 작은 마을들을 지나게 되는데 걸어서 포르투갈을 여행하지 않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 작은 마을들은 큰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정겨운 느낌을 준다. 투박하지만 마음이 가는 집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가다 보니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게 되었다. 굳이 흙길을 통하지 않고도 다시 노란 화살표를 만났으니 오늘은 여유 있게 계속 도로를 통해 목적지인 ‘Golega’를 향해 가려는 나를 누군가 소리쳐 불러 세웠다.
“이 봐, 이 봐!”
누군가 소리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자신에게 와보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세차게 손짓을 했다. 그에게 다가가니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에게 열심히 말하였고 내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빤히 쳐다보니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기다리라는 듯 검지를 내밀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잠시 후 알맞은 단어를 생각해낸 듯,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며 할아버지는 물었다.
처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가 가려고 했던 방향을 가리키고는 손으로 X 표시를 하며 고개를 저었고 산길이 보이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롭게 도로를 통해서 가려고 했던 나의 계획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고 할아버지가 너무나 완고한 자세로 길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애써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길로 들어선 지 1시간도 안 돼서 아까의 작은 마을에서 뚝심 있게 도로로 가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왜냐하면 오늘을 포함한 지난 4일 동안 가장 걷기 더러운 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걷기 더러웠던 그 길을 킥보드를 끌며, 들며, 물에 씻기며, 째려보며 걸어 나갔다. 예상치 못 한 고난에 핸드폰 배터리가 잦은 사용과 추운 날씨로 인해 빠르게 닳아 가듯이 나의 여유 또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빗방울과 쉽게 나아가지 못하는 산길로 인해 쉽지 않았다. 오늘 오전에 했던 여유를 갖고 나아가자는 다짐을 어느 순간 ‘툭’하고 놓아버렸다.
돌이켜 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내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 관계, 상황 등을 ‘툭’ 하고 놓아버린다.
고등학생 때, 나는 남녀를 불문하고 다양한 친구들과 쉽게 가까워졌다. 내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막힘없이 다가갔고 대부분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정해 놓은 어떤 선을 상대가 넘었을 때 나는 혼자서 쉽게 그 관계를 포기해버렸다. 상대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단절된 관계에 어리둥절했고 당황스러워했다. 그렇게 포기한 관계는 다시 돌이킬 수 없었고 나는 다양한 친구들과 쉽게 가까워진 것보다 더 쉽게, 더 빨리 멀어졌다. 관계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관계를 쉽게 생각하고 그 소중함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툭’하고 놓아버렸던 모든 것들이 미친 듯이 그리워졌다.
복잡해진 감정과 날뛰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내가 언제가 되고야 말, 어느 상황에서든지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찾아 헤매었다. 아킬레스건은 계속해서 아파오고 돌덩이 같은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갔지만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가장 고난스러웠던 산길 역시 끝이 나고 ‘Golega'로 향하는 도로가 나왔다. 하지만 다음 도시가 보이는 평탄한 도로가, 곧 편히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어제처럼 반갑지 않았다. 겸허한 자세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였고 아킬레스건의 통증으로 킥보드를 타지 못 하고 절뚝이는 다리에도, 조금만 움직여도 느껴지는 어깨 통증에도 얼굴을 결코 찡그리지 않았다. 그저 서두르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도시 초입에 있는 식당에서 네다섯 명의 아저씨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나는 먼저 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 역시 환하게 웃으며 나의 4번째 도시 도착을 축하해주었다.
#알아두면 좋은 정보(tip)
- 도미토리를 이용하므로 예민한 편이라면 귀마개와 안대를 가지고 가자.
-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을 살 수 있다.(아이폰 충전기 등)
#오늘 걸은 길
- 출발: 08:24 / 도착: 14:20
- 거리: 약 31km
- 경비: 24.42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