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2일 차 - 킥보드를 위하여
호스텔 직원의 밝은 작별인사를 받으며, 코임브라를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르게,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다음 도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내게 있어 포르토는 단지 코임브라를 더욱 그립게 하는 도시일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코임브라에서 하루 더 머물러도 됐을 텐데….’하고 후회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저 다음에 포르투갈에 왔을 때 포르토에 투자할 시간을 코임브라에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속 길을 걸었다.
오늘은 드디어 애증의 킥보드를 고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이렇게 마음먹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킥보드가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바퀴 흔들리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치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따라서 버릴 수 없다면 하루빨리 고쳐야 했다. 더해서 포르토는 대도시에 속하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나마 높았다. 사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가장 고치고 싶은 이유는, 걷는 데에 지쳐 이제는 킥보드를 좀 타고 싶은 것이었다. 요 근래 내리막길에서만 감질나게 킥보드를 타다 보니 다시금 평지에서 발을 굴리고 싶었던 것이다.
도시 내에서 킥보드를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일단은 킥보드를 구입했던 데카트론으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데카트론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데카트론에 가더라도 킥보드를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2시간을 걸어서 간다는 것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하는 문제였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못 고치게 된다면 그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순례자의 길에서 버스나 지하철 같은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며 이 길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자존심을 세우기엔 데카트론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그나마 다음 도시인 'Barcelos'에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 데카트론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규정한 채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이용하여 데카트론 근처 역을 찾고 그곳까지 가는 노선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노선은 아니었고 우려했던 것보다는 시선을 덜 받으며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동차 안은 편안함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내가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를 단 몇 분 만에 와버렸기 때문에 나는 편안함이 좋으면서도 지금까지 걸은 나의 수많은 시간들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허탈감은 오래가지 않고 증발했지만.
한적한 역에서 내려 따스한 햇볕을 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없이 걸었던 울퉁불퉁한 돌로 된 타일, 한적한 길가, 평화로운 분위기. 지금껏 지나 온 여느 작은 마을과 다르지 않은 조그마한 동네였다. 지도를 보며 마을 어귀를 조금 벗어나자 도로가 나왔고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걷자 커다란 사각형 건물의 데카트론이 보였다. 큰 기대 없이 건물로 들어가 직원을 찾았다.
“이거 데카트론에서 산 킥보드인데 혹시 고칠 수 있나요?”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선 다른 직원을 부르더니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여기서는 못 고치지만 근처의 다른 데카트론에 가면 고칠 수 있어”
전혀 예상을 하지 못 했던 말이기에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말뜻을 이해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킥보드를 고칠 수 있다.’
직원이 내게 말해준 ‘근처의 데카트론’은 알고 보니 40km 정도 떨어진 ‘Braga'라는 도시 근방이었다. 포르토에서 원래 목적지인 'Barcelos'와 비슷한 거리에 있는 'Braga’로 목적지를 바꾸고 온 마음을 다해 직원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데카트론을 나와 새로운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히(?) 도시까지 도로가 이어져 있어 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도로에는 지금까지 나를 지나쳐 간 차보다 많은 차들이 오고 갔다. 유리창 안에서 보내오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선들을 이겨내고서야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도시 'Braga'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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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싶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누워있고만 싶다.’
눈을 뜨자마자 한 생각들이었다. 그냥 이 호스텔에서 하루 더 머무를까 생각해봤지만 오늘은 꼭 걸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오늘이 중요한 이유는 킥보드를 고치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귀하디 귀한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걸어야만 하는 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차분히 길에 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가벼울 날 없는 몸을 이끌고 나온 대도시 ‘Braga'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작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자니 어느 정도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 도시로 가기 전에 먼저 킥보드를 고칠 수 있다던 데카트론으로 향했다. 역시나 도시 외곽에 위치한 데카트론으로 가며 이것이 킥보드를 고치기 위한 나의 마지막 노력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더 이상 킥보드를 위해 시간을 쏟지 않을 것이며, 이곳에서 고치지 못한다면 버리든지, 새것을 사든 지, 길을 안 걷든지 할 생각이었다.
“이거 데카트론에서 산 킥보드인데 혹시 고칠 수 있나요?” 똑같은 질문을 다른 지점의 똑같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직원에게 물었다.
그는 다른 직원을 불러오더니 나의 킥보드를 가지고 정비실로 보이는 곳으로 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았다. 30여분에 걸쳐 10여 개에 달하는 도구를 가지고 씨름을 하던 그들은 결국에 바퀴를 떼어내고 새로운 바퀴를 가져와 수리를 해내었다. 나는 그 과정을 마음 졸이며 지켜봤고 수리가 완료되었을 때에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생명이라도 구해준 듯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조심스럽게 가격을 물었다.
“공짜야, 그냥 가도 돼” 그들은 천사 같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뭐? 새로운 바퀴를 달았는데 공짜라고? 진짜 공짜야?” 나는 거듭해서 물었다.
“응. 진짜 공짜야.” 그들은 재차 답해주었다.
놀라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공짜'라는 단어는 새로운 바퀴를 가져오는 것을 보며 가격을 어림해보고 있던 나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원하던 것을 받은 아이처럼 만들었다. 그들에게 *오브리가도(obrigado)를 세 번은 더 말하고서야 데카트론에서 나왔다. 조심스럽게 킥보드에 발을 올리고 땅을 차 보았다. 킥보드는 마찰이 없는 것처럼 부드럽고 부드럽게 나아갔다. 이성을 잃은 기쁨은 오르막도 킥보드로 오르게 만들었다. 물론, 곧이어 아무리 기뻐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는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obrigado: ‘감사합니다.’란 뜻의 포르투갈어.
데카트론 옆 이케아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도시인 ‘Ponte de lima'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길을 나선 지 1시간 여가 지나자 고쳐진 킥보드를 굴릴 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걷는 게 고작'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였다. 애써 고친 마찰이 없는 것처럼 잘 나아가는 킥보드를 타지도 못 하고 끌고 갔다. 어쩌다 내리막길이 나오면 그제야 간신히 몸을 올릴 수 있었다.
적당한 내리막이 길게 이어져 겨우겨우 'Ponte de lima'의 첫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방명록이 눈에 띄어 펼쳐보았다. 한글이 종종 보였는데 하나같이 다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다들 이렇게 힘들었구나’하며 그들이 남긴 흔적으로 위로를 받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음을 기록했다. 언젠가 내 글을 보며 위로받을 누군가를 위해.
#오늘 걸은 길 (11일 차 / 12일 차)
- 출발: 09:10 도착: 17:53 / 출발: 09:59 도착: 17:03
- 거리: 약 47km / 약 32km
- 경비: 36.78 Euro / 20.4 E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