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하루 일과: 오후 편

by 오전직업

<오후>


나의 직업은 변호사이다.

변호사가 하는 일은 주로 다른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의견을 주는 일도 많다. 그런데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사내 변호사’에게 고객은 곧 동료이자 선후배이므로 마음껏 책망(?)할 수가 없다. 더구나 방송국인 회사에서 가장 필요한 전문가란 변호사라기보다는 기자, 피디 혹은 출연자 등이라, 변호사가 배우거나 알아야 할 실무가 훨씬 많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사정을 듣고, 의견을 조율하고, 정제된 언어로 바꾸는 일을 한다.


일하는 틈틈이 엄마로서의 역할도 한다.

아이들 학원 시간을 세팅하거나, 주말 계획을 세우고, 계절마다 자라는 아이의 몸에 맞춰 옷을 사거나 하는 것. 퇴근 후에 해도 되지만 학원에 연락하는 등 퇴근 후엔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은행업무도 마찬가지다. 육아기 단축근무를 시작한 후로는 회사에서 이런저런 ‘집안일‘ 할 시간이 확 줄었다. 근무시간은 줄었지만 업무내용은 줄어들지 않은 덕분이다. 하루에 고작 한 시간 단축했을 뿐인데, 업무강도는 완전 타이트해졌다. 회사로 주문한 택배 찾으러 갈 시간도 미리 계산해서 화장실 가는 김에, 미팅 가는 김에 간다. 버려지는 시간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엄마랑 수다 떨 시간이 없다.

당장 필요한 대화만 나누고, 후다닥 전화를 끊는다. 아이들 있을 때 전화하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대화를 나누게 되어서 엄마와 딸의 내밀한 얘기,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농담 등을 나누기가 어렵다. 친구랑 수다 떨 시간은? 친구와의 통화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법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 주로 이뤄진다. 그래도 가정이 생긴 어른에게는 원래 친구와의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른에게도 엄마는 필요하다.


아이에게 엄마의 역할을 하는 것은 내 첫 번째 역할이다. 내가 안 하면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 회사에서 근로자로 일하는 건 첫 번째는 아니지만 역시 뒤로 밀리지 않는다. 근로자로 일하지 않으면 급여를 받을 수 없다. 남편에게 아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많이 밀리지만 계속 미뤄두면 내가 힘들어진다.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스트레스받는 건 나니까. 엄마에게 딸의 역할을 하는 것은? 최후순위이다. 미뤄두어도 당장 내게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자꾸 미뤄두다가 병이 드는 건 엄마와 나의 마음이다. 알면서도 여전히 엄마가 병원 다녀온 결과가 어땠는지, 요즘 맛있게 먹은 음식은 뭐고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영상은 무엇인지 묻는 전화는 뒤로만 밀린다. 아이들이 아파서 일찍 데리고 와야 하는 날, 도와달라는 연락만 칼같이 보낸다. 외로워서 마음이 아픈 엄마에게, 다 귀찮다는 엄마에게, 아이를 핑계로 구슬려본다. 엄마에게 필요한 아기는 나일 텐데 내 얘기를 터놓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할까 싶다. 아이들을 봐주시려고 엄마가 오면, 내가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다, 아이 밥을 챙겨달라거나 도와달라는 얘기를 건네고 만다. 엄마는 이런 나를 언제까지 이해해 줄까.





<저녁>


퇴근 후에는 유치원 끝나고 학원으로 가 있는 첫째를 픽업해서 회사 구내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

다른 엄마들에 비해 저녁거리 걱정을 안 한다는 점에서, 회사 식당으로 이모님 비용을 절약하고 있는 셈이다. 늘 안 매운 반찬만 나오는 건 아니라서 편의점에서 파는 조미김은 필수다. 어쩔 땐 김만 해서 밥을 먹일 때도 있다.


그럴 땐 어린 시절 내 기억을 떠올린다. 감기에 걸려서 입맛이 없던 날, 엄마는 밥 한 그릇을 푸고 김과 김치를 들고 와서 언니와 나를 옆에 앉혔다. 밥 한 공기에서 한 숟가락을 떠 잘게 자른 김치 조각을 넣고 김에 싸 우리를 번갈아 먹였다. 내 자리에 앉아 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엄마가 먹여주는 게 좋았고, 언니와 번갈아 먹는 것도 재미있어서 우리는 뚝딱 한 그릇을 먹었다. 분명 입맛이 없을 때였던 것 같은데 밥이 너무 맛있었다.. 다음 날, 밥을 잘 먹어서 감기가 싹 나았다며 칭찬받은 기억까지 남은 걸 보면 말이다. 내 아이도 엄마가 먹여주는 저녁 식사가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기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말아 넣는다.


첫째 저녁을 해결하고, 아직 어린이집에 있는 둘째를 데리러 같이 간다.

유치원에 가게 된 첫 째의 저녁 식사와,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의 하원을 한 큐에 해결하기 위한 스케줄이다. 엄마인 내가 아이 둘을 책임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씩 양보해주고 있다. 첫째는 아이 입맛에 맞는 저녁 반찬을 양보하고, 둘째는 남들 다 집에 간 뒤에도 거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엄마와 누나를 기다려준다. 가끔은 엄마랑 둘이 집에 가고 싶은 날도 있고, 본인이 먼저 나와 누나를 데리러 가고 싶은 날도 있을 텐데. 어쩌다 있는 그런 날을, 기쁜 이벤트로 받아준다.


아무튼 아이 둘을 픽업했다며 이후론 마음을 조금 놓아도 된다. 어린이집 친구, 동생들과 회사 앞 광장에서 뛰어놀다 집에 가기도 하고, 굳이 살건 없지만 편의점에 들러 작은 막대사탕이나 젤리를 고르기도 한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 여덟, 아홉 시가 예사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꾸벅 잠에 들기도 하고, 둘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집에 오면 씻고, 내일 준비물을 정리하고, 아이들이 늦지 않게 잠들 수 있도록 시간을 조율하는 게 큰일이다. 하루 종일 놀다 온 것 같은데 집에서 해야 하는 놀이는 항상 따로 있는 데다가, 그 놀이의 주요 파트너는 엄마라서, 손으로는 설거지를 하고 집을 치우면서도 입으로는 놀이를 한다.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샤워를 즐기는 시간이 유일하게 나를 가꾸는 시간인데.. 아이들은 불쑥 화장실 문을 열어 “엄마 그거 어디 있어?” 하고 묻기가 예사다. 그래도 “엄마 티비 봐도 돼?” 하고 꼬박꼬박 물어보고 아이패드를 켜는 아기가 너무 예뻐서, 문 열지 말라고 다그칠 수가 없다. 그래 우리끼리만 있는데 뭔 상관이니. 시어머니가 계실 때만 벌컥 문 열지 말자.


문제는 생리 때다.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온 아기라고 해도, 엄마가 달마다 피를 흘리는 모습은 보여주는 게 꺼려진다. 생리대를 갈거나 생리컵에 담긴 피를 따라내는 모습을 본다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리를 떠나지 않을게 뻔한데, 설명하는 건 둘째치고 그 장면이 아이 입장에서는 꽤나 충격적일 것만 같아서 되도록이면 책으로 먼저 접한 후에 들키면 좋겠다. 그래서 늘 나 혼자 마음이 급해 서두르게 되는데, 한 번은 밖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려 급한 대로 생리컵을 쑤셔 넣는 바람에 컵이 자궁 안쪽에서 돌아가서(위치에 맞게 제대로 장착이 되어야 나중에 꺼낼 때 쉬워요), 저녁에 혼자 화장실 변기에 앉아 산부인과 응급실을 검색하기도 했다(다행히 스스로 해결했다).


그 외에도 내 몸의 변화를 챙겨볼 겨를이 없어, 대상포진이 올라온 건 모기 물린 걸로 치부하고 며칠을 흘려보내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날도 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아직은 그나마 젊고 건강해서. 그렇게 내 몸에 민감해하지 않아도, 결국은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거다. 다만 아이의 몸과 마음의 변화를 작은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가 나처럼 조금은 견딜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밤 10시에 가까워지는 시간, 독촉하고, 달래고, 분위기를 조성해서, 잘 준비를 마치고 모두 다 같이 침대에 눕는다.




하루 일과에 아빠나 할머니들이 끼어든다면 숨 돌릴 시간이 조금 있는 것이고, 그들이 없더라도 일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로 살고 있다면 아마 우리의 일상은 어느 시간이 조금 더 오래가느냐, 뭐가 더 힘드냐 정도만 다를 뿐 큰 차이는 없을 거다. 내 존재나 행복에 대한 고민은 차치하고, 당장 내일 옷을 뭘 입힐까도 길게 고민할 시간 없이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하고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든다면 정말 좋겠지만, 대개는 내일 챙기자, 다음에 생각하자로 내일의 나에게 미뤄두고 하루를 접는다.


내가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사는데도, 하루가 흐른다니.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잘 크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한 계절이, 일 년이 무사히 지나가다니. 다시 생각해 보면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조금 더 마음 놓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저 닥치는 대로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를 살일이라면,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오늘 저녁 일정은 어제보다 조금만 더 평온해보자 우리 셋. 파이팅.


해가 긴 여름, 하원길에 만난 예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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