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시어머니

by 오전직업

사랑의 대상이 많아지면, 사랑은 배가 된다.

라고 믿었다.


포도를 임신하고, ‘엄마와 아빠가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에 아이는 누구와 있어야 하는가‘는 행복한 임신 중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회사에서 전문 계약직 신분이었던 나는 육아휴직을 고려할만한 여유가 없었고 첫 애를 낳자마자 아빠가 육아휴직을 한다는 것도 남편 회사 여론은 물론, 우리 가정에서도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친정엄마는 처음부터 완강했다. 아이를 봐주지 않겠노라고. 시어머니는 여수에 계셨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는, 이모님의 도움을 빌어 우리 부부가 충분히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육아를 안해봤으니 가능한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국가에서 비용을 보조해주는 산후도우미 분의 도움으로 3주를 보내고, 이모님이 오셨다. 본인이 아이를 전담해서 봐주진 않을 거지만, 딸의 출산과 건강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친정 엄마가 서둘러 구한 ‘프로 이모님‘이었다. 각 가정에 파견되는 산후도우미 교육을 담당하는 분으로, 이미 친정엄마 주변 분의 집에서 아이 둘을 케어하며 실력이 검증된 분이었다. 문제는 이 분이 스케줄이 이미 빡빡해서 몇개월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시 어린이집 학대, 이모님 학대가 이슈가 되던 터여서, 내가 사회를 믿지 못하게되었다는 점이었다. ‘엄마 호르몬‘덕분에 불신은 커질대로 커진 상태였다. 새로운 이모님이 오시면 아이를 이모님이 혼자 봐도 될까. 씨씨티비를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각 방마다 씨씨티비를 설치할 수도 없으며 사고가 발생하면 씨씨티비가 있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여수에 계시던 시부모님의 상경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혼자 며칠을 고민하고 남편에게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었다. 시부모님은 여수가 고향이시지만 젊은 시절은 내내 서울에서 보내셨다. 조기 은퇴 후 아들 둘은 서울에 남겨두고 부모님만 여수로 내려가셨기에, 줄곧 서울을 그리워하셨다. 친구들도, 교회도 서울에 있었고, 무엇보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들이 서울에 있었다. 우리 부부의 대출한도와 여수 집 가치를 따져보니 얼추 돈은 가능할 것 같았다. 시부모님은 한큐에 상경에 동의하셨다. 오직 친정 엄마와 이모님만 나를 걱정하셨는데, 엄마는 이미 ‘본인이 전적으로 봐줄 순 없다‘고 하셨던 바, 그때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믿었다. 내 안의 ‘엄마 호르몬‘은 사랑의 대상이 많아지면 사랑은 곱에 곱절로 늘어난다고 속삭였다. 내 아이에게, 더 큰 사랑을 줘야지. 여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해줘야지. 결심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처음엔 아주 좋았다. 시어머니는 호탕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분이셨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내게 본인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나는 결국 엄마라는 말을 해본적은 없지만, 지금도 나에게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엄마가 갈게’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아들만 둘을 낳았는데, 여자여자한 뜨개질이나 예쁜 것을 좋아하셔서 나와 취향이 잘 맞았다. 큰 형님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내가 보기엔 큰며느리 다운 대장부 성격이 있으셔서, 어리고 소소한 걸 좋아하는 나에게 시어머니는 딸과의 오손도손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살림을 잘 못하는 내가 국 그릇을 쏟아도 허허 웃으며 뒷처리를 해주셨다.


관계가 조금 달라졌다고 처음 느낀 건, 내가 기상 캐스터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진학한 다음이었다. 명절에 시댁에 내려갔는데, 친척분들이 “우리 집안에 변호사가 나오네”하면서 치켜세워주셨다. 그러자 어머니는 “변호사여도 시댁에 오면 며느리지. 변호사라고 다른가.”라고 응대하셨다. 딸이었던 나는 그 순간 며느리가 되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중도 포기한 아들(나의 남편)의 기가 죽을까봐 그리 말씀하셨던 것 같다. 누구보다 똑똑한 아들이, 가정형편 때문에 고시를 중도포기한게 너무 미안했는데, 며느리가 변호사가 되어서 아들을 무시하는 것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거다. 나에게 로스쿨 진학을 권유한게 아들(나의 남편)이고, (당시) 여전히 법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내가 보기엔) 사법고시를 포기한건 가정형편도 형편이지만 객관식 시험이었던 사시 1차의 관문을 넘지 못한 이유도 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고흐름으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딸과 며느리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가 생각이 정리된 건, 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닷새간 머물다 가신 다음이었다. 당시 로스쿨 학생이었던 나는 출근길 정체를 피하기 위해 아예 아침 7시에 등교를 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종일 공부를 하다가 밤 늦게 집에 돌아왔으므로, 어머니가 오래 집에 계셔도 불편할게 없었고, 때문에 서울에 볼일이 있던 어머니는 큰 아들 집이 아니라 둘째 아들 집인 우리 집에 묵으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엌에서 부산한 요리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집에 있던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토스트를 굽고 계셨다. 시댁에선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색하게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왜 나에겐 토스크건 뭐건, 먹고 가라거나 가지고 가란 말씀을 안하셨을까. 서운한 마음을 그대로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다음 날엔 내 도시락도 준비돼있었다.


시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신 뒤 나는 자주 어머니와 마음이 부딪쳤다. 이제 나도 내 살림을 어느 정도 꾸렸는데 그걸 마음대로 하시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내 아이를 돌봐달라고 서울로 모셨는데 그것도 잘 되지가 않았다. 아이는 어머니의 손길을 극구 거부했고, 아이가 가지 않으니 어머니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어머니와 남편, 나. 셋이 대화를 하다보면 나는 둘을 상대로 싸우는 느낌이 들때가 많았다. 가벼운 일상의 얘기인데, 어머니는 빠짐없이 남편의 입장에 가세했다. 남편이 나에게 “이 파라솔 받침대 크기 안맞는거 산거 아냐?” 하고 물어서 내가 “지난 번 제주도 여행에서 받침대 잘 썼었잖아” 했는데, 남편이 “그땐 받침대 없이 썼잖아. 언제 썼어” 하면, 어머니가 “나도 못봤어. 한번도 못봤는데?”하는 식이었다. 남편은 본인이 받침대를 꽂아본적이 없어서 기억을 못하는 것일테고, 어머니는 받침대를 사용했건 그냥 파라솔을 꽂았건 크게 관심갖고 본적이 없으셨을텐데. 대화가 대결 구도로 바뀌기 시작하면 나는 말문을 닫았고, 나중에는 남편과 나의 대화 자체가 점점 사라졌다.


남편과 나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드는 동안에도 남편과 어머니 사이의 대화는 계속됐다. 나에게 말을 건내지 못하는 남편이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머니였던 것도 같다. 한없는 사랑의 대상. 어머니는 무뚝뚝한 본인 남편보다 말많은 나의 남편(본인 아들)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의 입장, 취향을 잘 알고 있는 남편은 나와 대화를 하던 중에 종종 그 취향을 전했다. 다른 사람의 취향이라면 그렇구나 하고 듣고 넘길텐데, “엄마도 이 김치 맛있대”하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은 유독 마음에 박혀서 새벽녘 잠이 깰때면 생각이 났다.




사랑의 대상이 많아지면 사랑은 정말 배가 될까. 나의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아플때 할머니가 보살펴줬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이 따뜻해질까. 캠핑장에서 ‘친할머니‘가 사과 깎아주던 장면을 기억할까. 주말에 가끔 할머니댁에 가서 밥을 먹고 집에 돌아온 기억이 풍성하고 다채롭게 남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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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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