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육아랑은 안 맞는다. 아침에 어린이집에서 다른 반 친구들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환한 얼굴로 인사하는 남 변호사를 보며 확실히 느꼈다. ‘엄마엄마‘하면서 어리광 부리는 둘째를 들어 안아 선생님 무릎에 얹어두고 돌아서는 참이었다. 육아는 내 체질이 아니다. 하기 싫다거나 못해먹겠다 이런 게 아니라, 개개인이 각자 타고난 능력 중에 ‘어린이와 잘 지내는 능력‘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 능력이 크지 않다는 것뿐이다.
이십 대에 나를 만난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어린아이가 저쪽에서 장난치며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으면, 닫힘 버튼을 슬그머니 누르던 내 모습을.
능력이 부족해서 더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같은 스토리의 놀이를 몇 번이고 다시 해달라고 요청하거나, 몇 번씩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면 그게 그렇게 힘들다. 새로운 도구로 미술 놀이를 하거나,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재미있는데, 아이들은 익숙한 놀이를 변형하는 걸 더 좋아한다.
2.
이런 내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엄마 없이도 어느 정도 생존이 가능한 시기가 되자마자 둘째를 또 낳았다. 아이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둘 이상을 낳으라고 권유한다. 내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셋째도 진지하게 고민했을 거다.
예전엔 어린이에 대해 잘 몰라서 별 생각이 없었다면, 내 아이를 낳고 나니 어린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알게 된 것도 있다. 어린이들은 정말로 예쁘고, 귀여워 자꾸만 보게 된다. 곁에 있고 싶다.
세 살 무렵까지의 어린아이의 정수리에서 나는 다정한 냄새를 맡아본 적 있을까? 매일 맡지 않으면 잊어버리고야 마는, 어디서도 두 번 다시 맡을 수 없는 포근한 냄새다. 달콤하거나 향긋하지도 않은데, 아이의 정수리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바로 편안해진다. 그 어떤 아로마 오일보다도 강력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항상 뜨끈뜨끈한 동그란 머리통은 또 어떻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마음껏 먼지게 해주는 어린아이의 너그러움이 감사하다. 하루 종일 재잘대는 목소리는, 말하는 내용도 내용인데 그 소리만으로도 집중해서 듣고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화성과 가락이 없는데도 음악소리 같다.
짧은 팔과 다리, 전체적으로 자그마한 사이즈는, 다 자란 어른 옆에 있을 때 귀여움이 극대화된다. 사람은 왜 자라는 걸까. 모두가 이렇게 작은 채로, 짧고 불편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 모두가 이렇게 작다면 팔다리가 짧아서 생기는 불편함은 도구와 기술 발달로 해결되지 않았을까.
3.
물론 그저 바라보기에 예쁘고 귀엽다는 이유로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아이들은 겉모습만 아니라 행동도, 말도, 마음도, 총체적으로 예쁘고 귀여우므로, ‘바라보기에만 예쁘고 귀여워서‘ 라는 전제부터 틀렸다. 게다가 아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육아의 부담도 덜하다!
둘째를 임신하고 들었던 말 중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아이 둘이면 정확히 두 배가 아니라, 족히 네 배가 힘들다’는 말이다. 아이 하나를 낳고 내 시간이 없다고 징징댔는데, 둘이면 그 시간을 또 나눠 써야 하니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한 명이 울어서 달래고 있는데, 다른 아이까지 울어버리면, 누구를 먼저 달래야 할지도 모르겠고, 두 배로 데시벨이 커진 울음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기 일쑤다. 한 명일 땐 이것저것 알아봐서 도자기 만들기나 직접 연주를 접할 수 있는 생실연 공연에도 잘 데리고 갔었는데, 아이가 둘이 되니 알아볼 시간도 부족하고, 돈은 더 부족해졌다. 다섯 살 때 시작하면 좋다는 영어 유치원은 둘째가 태어나면서 진즉 포기했다. 지금 큰 애를 영유에 보내기 시작하면, 3년이 아니라 6년 동안 영유 학원비를 부담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4.
아이를 둘 이상 낳아야 한다고 설파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부모가 어찌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아이를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욕심도 버릴 수밖에 없다는 점. 내가 열심히 한다고 아이가 잘 크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지점이다.
아이 한 명 일 때 아이의 친구는 엄마나 아빠 같은 어른이었다. 반복하는 놀이의 즐거움을 모르고, 작은 일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는 김 빠지는 어른. 아이가 두 명이 되자 아이의 친구가 아이가 되었다. 같은 후렴구를, 등장하는 인물만 포도, 파니, 엄마, 아빠 등으로 바꿔서 목이 쉴 때까지 반복해 불러도 소리 높여 같이 합창하는 친구. 똥똥똥- 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며 통통 뛰고 있으면 옆에 와서 엉덩이를 맞부딪혀주는 친구다.
아이는 신나서 놀이에 몰입하고, 부모는 한발 물러설 수 있다. 상부상조다. 비싼 학원비나 체험비를 들이지 않아도 아이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둘째는 첫째를 따라 하면서 말도 빨리 늘고, 노래도 벌써 잘 부른다. 상부상조에 플러스알파다. 엄마는 첫째에게 영어나 수학 같은 선행학습 시키기를 포기했다. 둘째가 놀고 있거나 엉겨 붙어서, 선행학습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아서이다. 마음 한 켠은 찝찝하지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냥 넘어간다. 첫째에겐 럭키비키다.
5.
아슬아슬하지만 잘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가 첫 째 유치원 가방을 집에 두고 나온 걸 등원길 운전 중에 알게 됐을 때, 갑자기 마음이 무너져 아이들에게 신경질을 냈던 날이다. 둘째가 사탕을 달라고 해서 하나를 까서 줬는데, 본인이 직접 깔 수 있는데 왜 까서 주냐고 먹지 않겠다고 징징댔다. 나도 맞서서 버럭 화를 냈다. 둘째는 요즘 뭐든 스스로 하고 싶어 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는데도 말이다. 새로 사탕을 꺼내, 던지듯 껍질채 건네주었다.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파니가 (껍질 까는 거) 혼자 했어’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옆에 앉은 첫째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사탕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 오른손에 있는 껍질은 왼손으로 옮겨서 왼쪽에 있는 비닐봉지에 버리면 돼.” 차분하게, 동생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준다.
나에게 아이가 한 명이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자, 지금 같이 있는 유일한 사람의 성난 마음에 억눌려 어쩔 줄 몰랐을 거다. 그렇게 불편한 상태로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아이는 겁먹은 마음을 풀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했을 거고 나도 나대로 어른스럽지 못했다며 자책했을 거다.
그 자리에 다른 아이가 한 명 더 있은 덕분에, 둘째는 “누나 이렇게 하면 돼?”하고 입을 떼고, 나는 아차 하며 “포도 정말 친절하다, 파니가 스스로 해냈어?”하는 말을 건넬 수가 있었다. 아이에게 성급하게 신경질을 냈던 미안한 마음을 감추고.
6.
육아의 소질이 없는 내가 아이들과 다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금껏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상황을 내 판단이나 내 행동으로만 이끌어가는 게 아닌 덕분이다. 다른 아이라는 존재가 상수로 존재하고, 그래서 나도 자의든 타의든 손을 놓게 되는 덕분이다.
내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욕심을 거두면, 아이와 갈등이 생길 일이 없을까. 그렇다면 밥 먹는 동안만큼은 절대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나의 방침은, 욕심일까 아닐까. 밥 먹는 게 힘들다는 아이에게 내가 직접 숟가락을 떠서 배 부를 때까지 계속 입에 넣어주는 건 욕심일까 아닐까. 아침마다 초코 과자를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초코는 낮에만 먹는 것이라는 규칙을 정하는 건 내 욕심일까. 육아는 끝도 없이 어렵다.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 나에게, 아이가 둘이어서, 내 맘대로 할 수 없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