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내려놓을 거면 마음 편히 내려놓는 게 가장 좋은 답일텐데. 사람이 그게 잘 안된다. 사십여 년간 쌓아온 나의 즐거움들을 기어코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틈만 나면 적극적으로 딴짓을 하는데, 딴짓모음도 나름 재미가 있다.
최근 시작한 건 발레.
무용에 대한 로망은 어려서부터 있었다. 대학생 때 친한 친구가 예전에 고전무용을 배웠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는 앉으나 서나 몸가짐이 단정하고 꼿꼿했다. 늘 바른 자세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다니. 그때는 그녀의 그저 아름다운 태도가 부러운 게 다였는데, 아이를 낳고 점점 나이가 드니 이제는 정말 운동이 필요한 시기라는 걸 절감하게 됐다.
남들 다 하는 필라테스도 해보고, 로스쿨이나 임신이 안 돼서 고민이던 인생의 고비마다 함께 했던 수영도 다시 시작했다. 하고 나면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몸만 가벼워진 게 아니라 정신도 맑아졌다. 특히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에는 코감기를 앓다가 순간 코가 뻥 뚫린 것처럼 숨이 크게 쉬어졌다. 운동으로 열이 오른 몸을 움직이는 게 편해지자, 어깨를 짓누르던 고민과 스트레스 그게 그래서 어쨌다고?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다만 수영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었다. 운동 전후로 시간 낭비가 심했고, 대부분의 수영장은 자유수영 시간이 지정돼 있었다. 새벽 수영은 아이가 일어났을 때 집에 엄마가 없는 걸 알고 대성통곡할까 봐 못 가고, 아침이나 저녁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출퇴근하는 워킹맘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점심시간에 갈 수 있는 수영장은 회사에서 20~30분 거리에 있었다. 몇 번 팀장님 눈치를 보며 후다닥 다녀오긴 했는데, 꾸준히 하긴 어려웠다. 차선책으로 회사 앞 필라테스장을 몇 년 다니다가 발레에 눈을 뜨게 됐다.
처음 학원에 간 건 첫째 아이의 발레 수업을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셔틀버스가 있어서, 유치원에서 바로 픽업하여 발레를 알려주고 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시스템이라고 하여 친구 엄마 따라 바로 등록하기로 했다. 계좌이체 대신 카드 포인트를 쌓기 위해 직접 결제하러 학원에 갔다.
원장님은 체형 교정과 성장판 자극이라는 발레의 효능을 설명해 줬는데, 그중 체형교정이라는 포인트에 꽂혔다. '체형 교정은 제가 정말 필요한 건데요' 하고 농담 삼아 말을 던지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체형 교정까지는 안되더라도 출산 후 비틀린 골반을 손봐야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팔 근육이 튼튼하지 못한 엄마가 아이를 안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나마 힘이 있는 오른쪽 팔로만 아이를 안게 된다. 그리고 아이 무게를 팔로만 들어올릴 수 없으니 배와 골반 어딘가에 걸치게 되고 자세는 계속 뒤틀린다. 그나마도 안되겠어서 양 손으로 손 깍지를 만들어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다녔더니 손목에 관절이나 힘줄이 튀어 나오는 결절종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 꾸준한 운동과 교정, 재활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닌가. 그날 나와 아이, 두 사람 몫의 학원비를 결제하고 돌아왔다.
발레의 시작이 학원비 결제였다면, 다음 단계는 발레복 구입이다. 원장님이 알려주신 발레복 판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레오타드를 살펴보니 다른 세계였다. 수영복보다 모양이 다양하고, 무늬도 화려한 레오타드들. 그리고 여기에 하늘거리는 스커트와 발레슈즈가 한 셋트였다. 이왕 기분 전환으로 시작한 거, 제대로 해볼양으로 딸기우유빛 레오타드와 하늘색 랩스커트, 발레용 스타킹, 추천받은 소단사 브랜드의 발레슈즈를 구매했다. 발레복은 집이 아닌 회사로 배송시켰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하자 그날 점심에 후다닥 집에 가서 혼자 몰래 입어봤다.
마압소사. 이 옷을 입고 남들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생각하다니. 근육이 없고 굴곡이 없어서 그렇지, 마르긴 엄청 말랐다는 자만심에 이런 발레복을 지르다니. 비루한 내 몸에 붙은 눈부시게 환한 색깔의 발레복은… 못난 나의 몸매를 더 부각시키는 듯했다. 결국 갈색 레오타드에, 검정색 발레바지, 검정색 크롭탑을 추가 구매하여 첫 수업에 들어갔다.
발레수업은 아로마테라피 부터 시작했다. 몸에 좋은 허브나 꽃 향기가 나는 아로마들을 준비해주시면, 그 향을 맡고 블렌딩 해서 귀 뒤나 손목 등에 바르고 몸을 쓸어내렸다. 향긋한 냄새가 순간 나를 회사나 집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데려가주었다. 몸이 다 크고 굳을대로 굳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발레수업이다 보니,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는 게 수업의 주요 내용이었다. 스커트와 발레 슈즈까지 챙겨입고, 단체로 폼롤러에 몸을 문지르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우습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귀여운 아줌마들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춤이라고 해야, 아주아주 기본적인 동작들을 발레 바 앞에서 하거나 작은 강의실을 대각선으로 한두번 가로지르는게 다였다. 그런데도 음악에 맞춰 동작을 하면 스텝은 꼬이고, 앞뒤가 헷갈리고, 결국은 박자를 놓쳐서 한 박자 늦게 컨닝으로 동작을 이어갔다. 강사님이 시범을 보일 땐 분명 우아한 발레인데 내가 하면 탈춤이 됐다. 그래도 강사님은 동작 하나하나가 끝날 때 마다 ‘너무 잘하셨어요’, ‘내가 나에게 박수’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들 못따라해서 시무룩해있자, ‘우리 지금 연습해서 대회 나갈 것 아니잖아요? 즐겁게, 이 순간을 즐기면서 하세요!’ 라며, 표정과 시선처리를 강조하셨다.
발레 4개월차. 이제는 처음 사두고 못입었던 딸기우유빛 레오타드를 분홍색 발레용 가방에 챙겨 넣고 수업에 간다. 가끔은 똑바로 서 있는 내 모습이 정말 예쁘다. 발레 선생님이 추천해준 면역력 강화 영양제를 챙겨먹고, 작은 텀블러에 콜라겐 파우더도 챙긴다. 수업이 있는 날 만이라도 챙겨먹으려고 노력 중이다. 에센셜 허브 오일도 따라사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틈틈이, 결론 없는 회의가 지루하게 길어질 때, 차 안에서 아이들이 소리 높여 징징댈 때 슬쩍 손목과 귀 뒤에 발라본다.
내가 나를 챙겨야겠다는 진지한 깨우침이라기 보다는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렇다. 잠깐씩 내가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나의 여유시간이 생겼을 때, 짧은 시간에서 최대한의 효용을 거두고 싶다. 아이를 낳으면서 시작한 육아의 세계만큼, 내 생활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사건도 아닌데 고민할 게 뭐 있나. 그 육아의 세계란 것만 봐도, 몰랐던 고통만큼 몰랐던 기쁨을 주는바, 허락된 기쁨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문이 여러개 열려있으면, 이쪽 세계가 너무 답답할 때 잠깐 다른 세계에서 한숨 돌릴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