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오전직업

밖에서 보면 부러운 것 투성이다. 모르고 보면 대단해 보이는 사람, 대단해 보이는 일이 많다.


양가 어머니들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왔다. 남들 보기엔 어머니들 사이가 좋으시네, 황금연휴에 제주도 여행이라니 역시 돈이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 실상은,

남편의 회사 일로 제주도 출장이 잡혀서, 남편 비행기 값이 빠지는 김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것이다.


2. 실상은,

남편이 먼저 출장을 떠나버렸기에 워킹맘인 나 혼자 아이 둘을 등원시키고 재우고 하는 게 쉽지 않으며 그렇다고 혼자 애 둘을 데리고 제주도로 따라가서 남편이 업무를 하는 동안 아이들과 관광을 할 자신도 없다는 것이다.


3. 실상은,

어머니 두 분 중 한 분과만 여행을 떠날 경우 다른 분이 삐지는 게 분명한데 두 번 챙겨서 여행 갈 돈은 없고, 두 분 다 우울증이 있어서 한 분이 삐지면 후유증이 매우 심각해지는 문제가 있어서이다.


물론 제주도 너만 가냐 나도 가자 하는 심보가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결정적 이유가 된 것은 맞다만, 겉으로 보기에 다 좋아만 보이는 일에도 알고 보면 예상 못한 이유나 고충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이십 대에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서른 살에 로스쿨에 가서 변호가가 되었다. 현재 지상파 방송국의 법무팀 소속이면서 로스쿨 겸임교수다. 남편은 금융 계통의 전문직이고, 딸 하나 아들 하나 하여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딸이면 아이유, 아들이면 박보검‘이라는 태교 슬로건에 맞게 딸은 야무지고 섬세하며, 아들은 잘생기고 순하다 라고 생각한다.


남들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이력이고, 스스로 돌이켜봐도 꽤 뿌듯할 만큼 살아왔다. 그런데. 멀리서 본 이력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고 있는 매일은 힘에 부치는 날이 많다. 대상포진에 걸리고, 이유 없이 자다 일어나 구토를 하는 날도 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명상 어플을 켜고, 엄마가 좋아서 엄마와 양치하고 잠들고 싶다는 아이에게 울면서 엄마도 피곤하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결혼 후 십 년 동안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던 남편과는 사소한 화제를 꺼내는 것조차 용기내야 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원인은 육아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지금까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 온 어떤 일과도 달랐다. 심지어 배운 대로 조심하면 되는 임신기간과도 천지차지였다. 사람 한 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일은, 삼십오 년여의 지난 생과는 다른 새로운 생이었다. 그렇게 키워야 하는 사람이 두 명이다.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던져진 새로운 생은, 마치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처음 타는 것과 같았다. 서서 중심을 잡는 것도 어려워서 비틀거리고, 돌부리가 없어도 자꾸 넘어졌다. 그래도 차마 계속 쓰러져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미끄럼을 타는 삶이랄까.


그런데 미끄러져 가다 보니 스케이트를 신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보였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잡고 있는 작은 손이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내 의지로는 가지 않았을 공간까지도 흘러갔다. 땅에서 혼자 걸을 땐 걸어서 못 가는 곳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정신 차려 보면 몰라서도 못 왔던 곳에 이미 내가 있었다. 그곳은 더듬이가 꺾여 바닥에 누워있던 호랑나비도 다시 날고, 중성화 수술을 한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낳고, 토성과 지구를 오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무턱대고 그곳으로 가자는 말은 못 해도, 이미 얼음판 위로 발걸음을 뗀 사람이라면. 우리 같이 엉덩이를 밀어주며 그곳에 가보면 어떨까. 혼자 가면 힘들지만 여럿이 같이 가면 즐거우니까. 이미 작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미끄럼을 타고 있으니,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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