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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Nov 10. 2019

톰 포드식 공간 미학

싱글맨

 갑자기 새로운 세대 감별법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톰 포드를 생각하면서 '구찌'가 떠오르는 사람들과 'Tom Ford' 브랜드가 떠오르는 사람들은 서로의 세대가 다름이 분명할 것입니다.


1994년 구찌의 여성복 디자이너가 된 톰 포드는 구찌와 결별하게 된 2004년까지 세계 패션사에 길이 남을 전설을 써내려 갑니다.

LVMH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현재의 구찌 그룹은 부도 일보 직전에 젊은 피 톰 포드를 수혈해 완전히 다른 회사로 탈바꿈에 성공하고, 톰 포드가 떠난 후 다시 침체기를 겪다가 2017년 가장 hip 한 브랜드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됩니다.


이번 편은 구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톰 포드에 대한 이야기이니 현재가 아닌 과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나선 엘 고어는 'Information SuperHighway'란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옵니다. 미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더 이상 미국이 절대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전통적  산업을 버리고 인터넷 중심의 새로운 정보 산업들을 발전시키겠다는 젊은 행정부의 정책방향인데요, 이로 인해 전 세계에 인터넷 혁명이 일어납니다.


드디어 1994년이 왔고 미국이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의 키는 빌 클린턴과 엘 고어라는 40대의 새롭고 젊은 선장들이 움켜쥐기 시작하는 데, 동시에 바다 건너 유럽의 이태리에서는 전통의 '구찌'라는 당시 럭셔리 브랜드 세계에서 힘없이 몰락하던 왕가의 재건을 젊은 신성 톰 포드에게 맡기기 시작합니다. 90년에 구찌에 여성복 담당으로 합류했던 톰 포드는 94년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승진을 하며 완전히 구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고, 그리고는 패션계에 빅뱅과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 유명한 구찌의 sexy 광고들이 시작된 것이죠.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상할 게 없어 보이지만 20여 년 전 럭셔리 업계에서는 이 정도의 이미지도 성을 이용했다는 이슈를 만들어낼 충분한 거리가 되었고 96년에 시작된 도발은 매년 한 발씩 더 나아가다가 2003년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구찌의 G를 새긴 바디 왁싱한 모델을 등장시키며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많은 이태리 매체들이 광고를 금지시키고 톰 포드도 온갖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되지만 어쨌건 구찌라는 브랜드는 승승장구를 지속해 나갑니다.



도대체 톰 포드 이야기에 앨 고어는 왜 나왔었나 하실 텐데요, 톰 포드의 이런 전략은 새로운 세대를 타깃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다시 쓰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성세대가 점령하고 있던 기존 매체들의 부정적인 관점과 달리 검열과 통제가 없어진 인터넷이란 새로운 개념의 뉴미디어를 통해 클릭 한 번으로 전 세계에 톰 포드가 창조해낸 구찌의 새로운 이미지들이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한국도 PC통신에서 점차 인터넷으로 정보화가 확대되던 시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 정보화에 익숙지 못한 기성세대와 새로운 문화에 열광적인 신세대가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톰 포드의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시대적인 흐름의 방향에 정확히 돛을 펼친 요트처럼 매끄럽게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는 것을 정확히 읽어낸 그의 혜안이 브랜드의 성공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모두가 샤넬과 칼 라거펠트처럼 평생을 함께 하리라 생각했던 톰 포드와 구찌는 시끄러운 이혼을 선택하게 되고, 2005년, 구찌를 나온 다음 해 마침내 톰 포드가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발표하게 되는데, 그 이상의 정정성을 들였던 것이 바로 그 자신의 영화제작사인 Fade to Black의  설립이었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2009년 드디어 톰 포드가 처음으로 감독을 한 'Single Man'이 발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션 디자이너로 그가 보여주었던 이미지들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대학에서 패션이 아닌 실내 건축을 전공한 건축학 학사입니다.


그런 덕분에 그의 첫 감독작인 싱글맨은 영화의 스토리를 뒷받침 해줄 아주 뛰어난 장면 구성과 세트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영화의 주요 location이었던  주인공 콜린 퍼스가 사는 집으로 Schaffer Residence라 불리는 건축가 John Lautner가 1949년에 건축한 집이 등장합니다.


주요 자재로 glass가 대부분 사용된 이 집은 그렇기에 안에서도 밖을 내다볼 수 있고, 밖에서도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입니다.


Glass가 사용된 이런 형태의 건축은, 현재의 기준으로도 아주 모던한 느낌인데, 이 집이 건축된 시기는 무려 70년 전인 1949년입니다.   이런 형태의 구조와 디자인은 집이 건축되었던 1949년 전후 미국에서 많은 이슈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에 보는 그 유명한 필립 존슨의 코네티컷의 The Glass House도 1948년에서 1949년에 걸쳐 지어졌고, 필립 존슨에게 영감을 준 미스 반데로어의 Farnsworth House(아래)도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습니다.




물론 미스 반데로어는 이  House 건축에 대한 컨셉을 일찍이 모형으로 만들어서 일반에 공개했고, 미스 반 데 로어의 전시회를 기획하던 필립 존슨은 이 하우스 모형을 보고 영감을 받아  The Glass House를 설계 했다고 합니다.


건축의 양식은 미스 반데 로어가 창조해 내지만, 이 건축물을 예술적인 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바로 필립 존스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유사한 글라스 하우스 중에 그의 The Glass House가 가장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요,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였습니다.


미니멀한 구조, 대칭성, 전체적인 비율 그리고 빛의 투과와 반사에 대한 효과 등이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에 관한 미학적 가치라면, 진정한 이 건물의 가치는 Nature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코네티컷은 대공황 이후 월가의 부자들이 이주하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떠 오른 곳입니다.

맨해튼의 한 복판에서 이 교외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부자들은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 자신들의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만끽하려 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이 좋은 전원 풍광과 내가 한 몸이 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자연 친화적인 집은 없을까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들이 생겨났을 것이며, 그것에 대한 건축가의 응답이 바로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였습니다.


우리는 유리로 되어 있어 모든 게 드러나 있는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게 되지만, 만약 우리가 소유한 대지의 면적이 천문학적으로 넓다면 그래서 설사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여도 그 안을 볼 수 있는 거리 안에는 아무도 없다면 그런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그들은,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벽에 가려져 밖의 멋진 풍광들을 다 볼 수 없다는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즉 코네티컷의 넓은 정원 속에 지어진 이런 글라스 하우스는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미학의 완성을 가져오는 궁극의 건축물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 이 글라스 하우스는 대략 19헥타르의 대지 속에 지어졌고 그나마도 대지 안에 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연못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이면서 커다란 바위에 자연스럽게 가려지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1헥타르는 대략 3000평 정도라고 하니, 대지의 규모가 짐작되시나요? Farnsworth House도 3헥타르나 된다지만 16 헥타르 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옆길로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다시 톰 포드와 그의 영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물론 영화 싱글맨의 로케이션이 된 John Lautner의 건축물은 약간 상황이 다릅니다. 그렇기에 방에 해당하는 공간을 둘러싼 유리면은 나무를 이용해 외벽을 만들어서 프라이버시가 유지되는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톰 포드가 이 집을 영화의 주요 로케이션으로 정한 이유는 바로 유리를 통해 안과 밖이 투과되는 효과 때문이라는 데요, 감독이 한 줄로 표현하는 영화의 핵심은 바로 isolation입니다.


isolation이라는 것이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의 내면 안에 나와 또 다른 나 사이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주인공이 안에서 밖을 보는 이미지와 밖에서 주인공이 들여다 보이는 이미지는 그런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일 것입니다.


즉 주인공의 사방을 유리를 통해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공간표현 방식을 통해 관객들이 주인공의 캐릭터의 다층적인 성격을 한눈에 시각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전략을 바탕으로 이미지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방에서 달빛이 비치는 창틀 옆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조지입니다.


건물의 외관 느낌과 실내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도록 인테리어 요소들을 고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무 벽에 부조 형태의 목각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전등불과 커튼 그리고 침구까지 은은한 베이지와 아이보리가 조화를 이루어 집의 이미지인 자연 친화적인 컨셉과도 어울리고 있습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약간은 색이 바랜듯한 인테리어 컬러톤은 조지의 슬픔도 점차 바래서 엷어져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글라스 밖에서 보이는 조지입니다. 카메라와 주인공 사이에 글라스가 느껴지도록 촬영한 덕에 지켜보는 우리들과 조지 사이에 단절이 느껴집니다. 그것을 통해 조지 스스로가 외로움을 느끼며 고립되어 나가고 있는 내러티브를 자연스럽게 완성시켜 줍니다.



창문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는 조지가 마치 '당신들은 고독하지 않나요' 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톰 포드가 이 집을 영화를 위해 고른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들 이었습니다.


영화의 재미있는 특징 중에 하나는 출연하는 주요 남성 배우를 영국 배우로만 쓰고 있는데요, 그가 유럽으로 떠난 이후 뉴욕 타임스와의 이런 인터뷰 기사가 영국 남자 배우만을 쓰는 이유에 대한 우회적인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좋은 디자이너가 되려면 미국을 떠나야 했다. 우리 스스로의 문화가 우리를 방해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은 이상하고 촌스러움을 의미한다. 모두들 세련되기만을 기대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다양한 스타일을 높이 평가한다."


톰 포드가 유럽으로 진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곳은 Pelly ellis 였습니다. 당시 마크 제이콥스가 페리 엘리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었죠.  페리 엘리스의 브랜드 성격은 Preppy 적입니다. 다시 말해 사립학교를 다니는 부잣집 도련님 패션이란 뜻이죠. 다양하고 거침없는 그래서 각자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유럽에 비해 미국의 패션 방정식은 마치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과거 유서 깊은 가문들의 문장들이 다시 태어난 듯이,

 내가 속한 계급을 보여주는 틀에 박힌 스타일 (보통 세련되다 또는 깔끔하다로 대변되는)이 강합니다.


부자면 페리 엘리스나 DKNY를 입고 조금 덜 부자면 토미 힐피거, 폴로 랄프 로렌을 입고 그도 안되면 갭을 입고 하는 이런 느낌 말입니다. 선택의 어려움이 줄고, 사람들이 나의 사회적 위치와 부의 정도를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시스템적인 편리함은 늘어납니다. 그러나 천편일률적이고 획일화되어 보이겠죠.


톰 포드가 원했던 패션은 이런 안전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서 스타일에 예민한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싶었던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 남자 배우에 비해서 영국 배우들이 훨씬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 준다고 보이고 주요 배역 3명을 전부 영국계로 캐스팅한 감독의 고집스러움이 이해가 됩니다.


콜린 퍼스, 니콜라스 홀트 그리고 매튜 구드가 각각 맡았던 3명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연령과 신체적인 차이 이상으로 그들이 구현하는 캐릭터의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은 미성숙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궁금해지고 관심을 갖게 하는 니콜라스 홀트가 연기한 캐니, 익숙하고 편안함을 주지만 그렇다고 식상해지지 않는 아련한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 매튜 구드가 연기한 짐, 그리고 못 다 이룬 사랑의 아품속에서 새로운 사랑이 싹트는 혼란을 겪는 조지 하지만 결국 그를 위로하고 달래 주는 건 오랜 그의 여자 사람 친구 찰리입니다.


이렇게 조지를 위로해 주고 달래줄 수 있는 찰리, 그녀의 캐릭터 성격에 맞춘 인테리어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는데요,




볼드한 스탠드, 금속에 상아를 이용해 장식한 아르 데코 양식의 모로칸 거울, 그리고 생기 있는 red위에 강렬한 패턴이 겹쳐지고 있는 패브릭, 마지막으로 글래머러스한 양털 의자 등은,

생기 넘치고 화려하며  호기심 많은 찰리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의자들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의상 역시 그녀가 질서와 규율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자유스러운 영혼임을 보여 주는 요소입니다.


그녀의 침실 전경 입니다. 위에서 보여드렸던 조지의 침실은 심플하며 남성적입니다. 묵직한 원목들이 사용되고, 단색조의 중후함이 느껴지게 꾸몄죠. 반면에  찰리의 침실은 활기차고 화려한 주인공의 성격이 드러나게 꾸며져 있습니다. 과감한 패턴의 침대 헤드와,  조각이 눈에 띄는 램프화면을 3등분해서 채우고 있고, 그 아래에는 차분한 새틴 침대 커버를 깔아서 색조도 맞추고 장식의 균형도 이루고 있습니다.


톰포드의 <싱글맨>은 그가 단정하고 깔끔하며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채로운 스타일을 보여주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면모 뿐만이 아니라 정제되면서도 자유분방한 인테리어를 통해 톰 포드만의 공간 미학까지도 유감없이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인테리어 스타일의 공간 연출을 통해 섬세한 개성을 지닌 개인들이 서로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껴주고 위로받는 장면을 만들어 나가며,  isolation이 존재하고 사멸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스크린 위에 이미지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영화 <싱글맨> 에서 드러나는 톰 포드의 안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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