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고온다습의 대한민국 여름인 건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더운 날에도 역시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계속 돌려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래서 수많은 OTT 플랫폼을 다 결제해서 보고 있는 걸지도.
<크리미널 마인드>는 기분이 안 좋을 때 보는 킬링 타임용 드라마로 딱이었다. 인생 아무리 지루하고 힘겨워도 미친 사이코패스한테 납치당하고 사지가 절단되며 온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건 아니니 감사히 잘 살자, 뭐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물론 최근 뉴스를 보면 그냥 길을 걷다가도 칼을 맞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침대에 누워 보는 <크리미널 마인드>를 보는 것만큼 평온한 순간도 없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이자, 천재 너드를 상징하는 캐릭터인 스펜서 리드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꾸준히 본 사람이라면 다 알 듯, 그에게도 단 하나의 사랑이 있었는데, 메이브 도노반이다.
두 사람은 주로 통화를 하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아니, 주로가 아니라 100% 통화로만 이야기를 나눈다. 한 번도 서로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온전히 대화로만 서로를 느낀다. 그저 플라토닉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고차원적인 뭔가가 내재된 감정의 공유였다.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 않냐는 동료의 말에 스펜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긴 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제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걸요. 다만, 절 안 좋아하면 어쩌죠? 전 좀 괴짜잖아요. 구부정하고 머린 너무 길고, 넥타이도 계속 삐뚤어지고... 외모처럼 사소한 걸로 특별한 관계를 망칠까 봐 걱정이에요."
미쳤나 봐. 너무 멋지잖아.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걱정으로 가득한 스펜서의 얼굴이 진실되게 느껴졌다.
사랑을 말하는 남자 중에 이보다 더 멋있는 남자가 있을까.
그는 여자들이 원하는 강한 남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FBI 요원인데 총을 더럽게 못 쏜다니까요? 삐쩍 말라서는 머릿속에 있는 걸 줄줄 말해대는데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요? 하지만 스펜서는 그래도 멋있는 남자다. 뷰티 인사이드라고, 외모와 상관없이 깊은 사랑을 느끼며 오히려 사랑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귀엽고 스윗한 남자니까. 이 정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총 쏘는 법은 그냥 내가 배울게요.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주인공 장재열(조인성 분)도 멋진 남자다.
(SBS/ 극본 노희경 연출 김규태/조인성, 공효진, 성동일, 진경 등 주연)
하지만, 스펜서처럼 쭈구리(?)는 아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당당하고 할 말은 다하는 성격이며, 지가 잘난 것도 안다.
"인정해. 난 짐승이야. 네가 솔직한 토크를 원해서 하는 말인데, 지금 내 머릿속엔 너랑 자고 싶은 생각이 가득해."
"받는 만큼 준다. 네가 허리를 주면 나도 허릴 주고, 네가 키스를 주면 나도 키스를 주고."
이게 장재열이다.
스킨십을 거부하는 애인에게 징징대며 매달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는다. 솔직하게 마음을 이야기하고 가치관대로 행동하는 남자다. 무조건적인, 헌신적인 사랑을 원하는 여자들에게, 대표적으로 나에게는 그리 멋있게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인 것 확실하다. 어떨 때는 좀 져줬으면 좋겠는데, 살짝 얄밉기도 하다. 널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식의 남자 주인공에게 익숙해진 우리에겐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재열도 작아지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병 때문에 병원에 있던 순간이다.
"안아주고 싶은데, 안 될 것 같아. 나... 안 섹시하지?"
해수(공효진 분)는 재열이 자신을 만나면 스키조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키고 보러 가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안 보고 살겠는가. 몰래 자신을 보러 온 해수에 재열이 묻는다. 나 안 섹시하지? 이 말은 너에게 더 이상 이성적인 매력이 없지? 얼굴은 푸석하고 환자복 차림에 아직도 환영이 보이는 나는, 너에게 사랑받을 수 없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장재열도 사랑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사랑이 전부인 남자였다.
약간 바보(?) 같은 남자가 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다 티가 나지만 선뜻 뭔가를 하지 못하는, 그렇지만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 <프로듀사>의 백승찬(김수현 분)이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진 선배님이 준모 선배님을. 저는 그 마음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남자는 정말 바보 같다. 예진(공효진 분)이 준모(차태현 분)를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예진을 좋아한다. 사람 마음이야,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치고, 일상생활에서도 좀 바보 같다. 사랑의 바보 뭐 이런 게 아니라 진짜 바보. 어리바리, 찌질이, 띨띨이. 이런 표현이 그를 설명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승찬은 가식이 없다. 진솔하고 진중하다. 남을 시험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다. 그런 매력 때문에 신디(아이유 분)는 승찬을 좋아하게 된다. 얘는 쟤를 좋아하는데, 쟤는 또 저기 쟤를 좋아하고, 옆에 있던 애는 또 얘를 좋아하는, 이 물고 물리는 사랑의 먹이 사슬은 정말이지... 너무 재밌어.
승찬은 예진과 신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당연히 예진을 선택한다. 이 남자는 어리숙하지만, 상대방을 헷갈리게 하지는 않는다. 노선을 정확하게 하는 것, 그게 이 남자의 진짜 매력이다.
"내가 선배 옆에 있는 게 당연해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한테도 시간을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예진이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자 하는 말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예진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며 말한다. 승찬도 사실 알고 있다. 예진의 눈에 자신은 남자가 아니라는 걸. 결국, 승찬의 짝사랑은 또 실패했다.
"다시 찍고 싶다. 선배를 이렇게 불편하기 만들지 않으면서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더 세련된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백승찬은 이런 사람이다.
나를 받아주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못났던 점을 되돌아보는 사람. 자꾸 실패해도 이 남자의 사랑은 이렇게 착하고 존중받을 만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해 잘해주고,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재고 따지지 않는 것. 이게 승찬의 사랑 방식이고, 삶의 방식이다.
사랑을 말하는 남자는 언제나 옳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드라마만이 가진 특권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방식은 다르더라도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온 남자들은 언제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