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사랑은 꼭 이루어진다. 드라마의 법칙이다. 주인공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딱 하나, 죽음뿐이다. 죽는 것보단 서로 사랑하는 게 낫잖아요.
하지만, 서브남주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다. 멀리서 바라보기, 위로해 주기, 응원해 주기, 참고 견뎌주기. 이 모든 걸 다 해주지만,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게 드라마의 또 다른 법칙이다.
단언컨대,
서브남주가 남주보다 멋있어지는 순간, 드라마는 망한다.
특히나 멜로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다른 남자보다 덜 멋있다는 건, 두 남녀의 사랑이 완성될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말과 똑같다. 더 멋있는 남자가 있는데, 왜 그 남자랑 키스하겠어요? 안 그래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죽고 못 살게 만드는 서브남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도 언제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랑을 말해왔다. 이들의 사랑도, 역시나 사랑이기에 아름답다.
돈 많은 남자는 한국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물론 돈만 많은 건 아니다. 참을성도 많다. 그게 서브의 덕목이다. 남자 주인공은 극적인 순간에 사랑을 터뜨려도 되지만, 서브남은 함부로 사랑을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랑을 표출하는 순간, 그들은 여자 주인공과 멀어지게 된다.
현실에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려고 하지만, 멜로드라마에서 그런 건 금물이다. 사랑하지만 부담을 줘서는 안 되고, 힘이 있지만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의 온도> 속 박정우(김재욱 분)가 그렇다.
(SBS/ 극본 하명희 연출 남건/서현진, 양세종, 김재욱, 조보아 주연)
드라마 중반까지의 정우는 사랑보다는 집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현수(서현진 분)가 정선(양세종 분)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까지도 사랑한다는 광기를 보여준다. 가진 재력을 이용해 정선을 압박하기도 한다. 그래, 네가 현수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는데. 난 다 해줄 수 있어, 라며.
하지만, 그런 정우도 물러날 때는 제대로 물러난다.
"내가 널 왜 좋아했는 줄 알아? 흔들리지 않아서. 한번 흔들어보고 싶었어. 흔들리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현수, 나한테 흔들린 적 한 번도 없어. 축하한다. 널 선택했고, 그 사랑에 내가 졌다."
정우는 단 한 번도 솔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다고, 흔들어 볼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졌다는 것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비참하지만 현수는 조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한다.
치사하고 비겁하게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는 순간 서브남의 매력은 없어진다.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좋아하는 만큼 잘해주고,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결국 응원해 주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솔직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그리고 애틋하게 사랑을 말하는 남자가 또 있다.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지성현(이상이 분)이다.
(tvN/극본 신하은 연출 유제원, 권영일/신민아, 김선호, 이상이 주연)
따지고 보면 혜진(신민아 분)을 먼저 만나고, 먼저 좋아했던 건 성현이었다. 근데 뭐, 사랑에 그런 게 중요한가요? 사랑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타이밍이요, 타이밍보다 중요한 건 누가 주인공이냐가 아니겠는가.
"아, 진짜 부럽다. 진짜, 진짜 부럽다. 나도 동정이나 걱정받는 거 말고 질투나 해봤으면 좋겠다. 어디 내 앞에서 딴 남자 얘기하냐고 큰 소리 뻥뻥 치면서 지랄 발광이나 해봤으면 좋겠다."
홍반장의 질투에 성현이 하는 말이다. 연인 간의 흔한 삐짐, 툴툴거림, 뭐 왜 뭐 같은 것들을 하고 있는 홍반장이 성현은 그저 부럽다.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내재된 마음이 잘 드러난 대사다. 서브남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걸 진짜 남주들이 알기나 할까.
"다행이다. 예전의 윤혜진처럼, 그리고 나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이렇게 용감하게 얘기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너는 존재 자체로 빛이 났어. 나는 단 한순간도 열심히 살지 않았던 적이 없는 너를, 항상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너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어. 그런 네가 내 첫사랑이라서 참, 영광이야."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는 혜진에게 성현은 너를 좋아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말한다.... 착해. 너무 착해...
이런 착하고 깔끔한 마인드를 가진 남자를 왜 안 좋아하는 거냐고 여자 주인공에게 따지고 싶지만, 이 드라마는 여주도 착하고 남주는 더 착한 드라마라 이런 상황도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서브남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응답하라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내 사랑 칠봉이도, 내 사랑 정팔이도 모두 최종 남편이 아니었다. 특히나 <응답하라 1988> 속의 정환이는 '어남류'라는 말까지 탄생시키며 우리 모두 당연히 그가 여자 주인공과 이어지는 최후의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택이를 이기지 못했다.
"운명은 시시때때로 찾아오지 않는다. 적어도 운명적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아주 가끔, 우연이 찾아드는 극적인 순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운명이다. 그래서 운명의 또 다른 이름은 타이밍이다."
"만일 오늘, 그 망할 신호등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면, 그 빌어먹을 빨간 신호등이 날 한 번이라도 도와줬다면, 난 지금 운명처럼 그녀 앞에 서있을지 모른다. 내 첫사랑은 늘 그 거지 같은, 타이밍에 발목 잡혔다. 빌어먹을 타이밍에."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다양한 캐릭터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오로지 멜로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정환이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 빌어먹을 타이밍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서브는 원래 그런 거다.
명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 <작은 아씨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조(시얼샤 로넌 분)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는데, 그게 또 너무 기가 막히게 재밌어서 출판사와 계약까지 하게 된다. 출판사 사장은 묻는다. 왜 주인공은, 그러니까 조는 왜 로리(티모시 샬라메 분)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는지. 누가 봐도 서로 좋아했고, 좋은 짝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러자 조가 대답한다.
"그는 여자의 동생과 결혼하니까요."
이게 뭔소린가 싶지만, 맞는 말이다.
드라마 속 설정은 오로지 작가의 몫이다. 작가가 정환이를 주인공으로 만들자 하였으면, 신호등이고 나발이고 문제가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작가가 조와 로리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면, 동생과 결혼하는 스토리는 나오지도 못한다. 어떤 설정이 먼저 인지는 상관없다. 동생과 결혼해서 로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님이 분명함에도, 그런 건 상관없다. 그냥 그렇게 되었고, 나중에는 또 그렇게 된 것일 뿐.
'선을 넘는다'라는 말이 공공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요즘이다. 이 시대에 올바른 서브남의 덕목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이고, 작가는 그 줄타기 속에서도 매력적인 서브를 만들어내야 한다.
삼각관계는 사실 굉장히 진부한 설정이다. 예전부터 있어왔고, 앞으로도 쭉 있을 설정값일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서브는 왜 서브로만 남아있어야 하는지는 작가가 결정한다. 이 얼마나 재밌으면서도 아찔한 결정인가. 그래서 작가라는 직업이 너무도 매력적인 것일지도.